[2017년 순교신학과목회 설교자료] 일사각오(一死覺梧)(구춘서총장)

관리자.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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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각오 (一死覺悟 )

(행 4: 13-22)

구춘서 목사(한일장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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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숨은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목숨을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달려가 붙잡고 목숨을 구하는 행동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로 우리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 본능적으로 구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입고 거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먹이셨습니다.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시며 거처가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거의 본능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목숨을 중시하는 우리의 권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그리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인권을 부정하는 국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목숨은 이처럼 소중합니다.

그런데 소중한 목숨을 아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보다 더한 가치가 있을 때입니다. 가령, 우리는 자신의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고 저항하고 싶을 때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음식 섭취를 거부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과거 독재정권 하에 국민의 인권이 유린될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 단식을 한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음식을 거부하는 단호한 행동을 통해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사례입니다. 이는 매우 극단적인 선택이지만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러한 단식을 통해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루어 낸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투쟁의 결과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본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행동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도 목숨이 소중하다는 전제를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경시의 풍조로 인해 너무 쉽게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인천에서 7명의 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냉혹한 경쟁, 가진 자들이 갖는 못 가진 자에 대한 멸시와 폄훼, 사회적 기회 상승 가능성의 부재, 만연한 갑질 문화 등등 이들을 극단의 선택으로 내몰아 간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절망 가운데 모두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선택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그들에게 찬성하거나 그들의 선택을 칭송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자살은 많은 사람의 칭송과 관심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목숨을 끊는 선택의 경우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비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자살에 관한 연구는 현대 사회학의 태동을 낳았습니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이 그것입니다. 그는 유럽의 도시, 농촌, 카톨릭, 개신교 지역에서 자살한 사람들의 통계를 자세히 추적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세 가지로 밝혀냅니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에 대한 분석이 그것입니다. 이기적 자살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살로 자신에게 주어질 모든 책임을 회피하는 의미에서 이기적 자살이라고 명명됩니다. 이타적 자살은 말 그대로 자기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것입니다. 부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상사의 이야기, 자신의 목숨은 버리면서 술취한 취객을 동경의 지하철에서 구한 이수현 군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의 변동으로 인한 관습과 문화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살을 매개로 하여 사회의 여러 현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로 인해 현대적 사회학이 태동할 만큼 자살은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제인 순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자살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는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신앙을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경우입니다. 또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보다 더 선교의 사역을 감당함으로 결국은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길을 가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함으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이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나치즘이 극도로 성행할 때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회퍼 목사의 사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시도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살아 있을 동안에 나치의 박해에 대해 이렇게 설교합니다. 임금이 벌거벗은 것을 말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누가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세 경우를 말합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 바보의 경우, 그리고 순교자의 경우입니다. 어린아이의 경우 아직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떠벌리며 놀려 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므로 갖게 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경우이지요. 어린아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의 대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본 대로 말합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사실에 대해 침묵합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침묵하거나 적극적으로 임금님의 옷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똑똑하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지요.

반면 순교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담대히 외치는 것이지요. 심지어 죽음이 기다린다 해도 그것을 말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알고 죽음을 감수합니다. 복음이 주는 능력에 힘입어 두려움을 물리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과 사도 바울이 그 뒤를 이었고 본 회퍼 목사를 비롯한 허다한 많은 순교자가 뒤를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결코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고상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목숨이 저들의 사명과 부딪치는 점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의 길로 걸어가는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본 회퍼 목사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신학자 칼 바르트가 사우스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그는 니코 스미스(Nico Smith)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복음을 설교할 수 있습니까?” “네,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설교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아니, 내 질문의 뜻은 그것이 아니오. 이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많은 사람이 믿고 행하고 있는 바와 다르더라도 설교할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 질문에 그는 즉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남 아프리카에는 흑인 차별주의정책(아파르타이트)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니코 스미스 목사는 아파르타이트를 지지하는 Broederbund의 회원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아파르타이트를 폐지하는 설교를 할 자유가 있느냐고 묻는 바르트에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를 내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남 아프리카 백인 목사로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목회자가 되고 흑인들의 거주지에 살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힘이란 이런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복음의 힘이 순교자의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방어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위기나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고자 가볍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안에서 허용됩니다. 가령, 여우가 넝쿨에 매달린 포도를 먹고 싶어 포도를 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딸 수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말합니다. “저 포도는 어차피 따도 시어서 먹을 수 없을 거야.” 그리고는 포도를 따지 못한 자신을 거짓말로 위로합니다.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지요. 순교자의 길은 이런 자기 방어 기재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걸어가는 넓은 길로 가는 편안함 뒤에 숨어있는 자기방어 기재 작동방식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날카롭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날카로운 사람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전진하게 됩니다. 자기방어 본능 내지 자기 합리화에 민감해야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 교회가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우리가 모두 자기 합리화에 안주한 결과 순교자의 신앙을 잃어버린 것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 민족은 대통령탄핵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바르게 나라를 이끌지 못하도록 잘 못 보좌한 참모들에게 물론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대통령에게 잘못 조언한 교회 지도자에게만 그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만약 내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는 자기방어 기재에 의해 아니면 그냥 익숙한 길, 넓은 길을 걸어가지는 않았을까?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존경과 신뢰의 눈길로 바꾸려면 순교자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임금님에게 벌거벗었다고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탄핵을 당할 정도로 망가진 대통령을 향해서도 바른말을 해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결코 과거의 신앙적 영웅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리고 그들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것은 그들의 신앙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희생의 터 위에 우리 교회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 맞고 능욕을 당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이러한 고통을 도리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했으나 도리어 순교자의 이런 정신은 도리어 후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교 신앙은 반드시 목숨을 내어놓고 능욕을 당하는 데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넓고 쉬운 길에 대해 아니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사도들은 당시 집권자들에게 일갈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순교자들의 신앙을 회복해야 할 당위성은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많은 재정을 담당하는 교인을 책망하는 설교가 얼마나 우리 강단에 선포되고 있습니까? 시대의 변화에 편승하여 예배하는 것의 중요성을 잃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쇠퇴하는 서구 교회를 너무나 닮아가고 있습니다. 주일 저녁예배는 진작 사라졌습니다. 새벽기도의 전통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새벽기도회로 간신히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순교의 정신 상실과 교회의 쇠퇴는 비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변명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금년은 루터의 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죽기로 각오하고 실제로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루터의 순교자 적인 정신이 우리 교회의 미래에 큰 올림으로 다가오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