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 택 ( 李 裕 澤 , 1905 ~ 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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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탄압이 키워낸 큰 일꾼 ”
생년월일 : 1905년 1월 9일
출생지 : 경북 안동군 도산면 운곡동
순교일 : 1948년 12월 28일 연행
순교지 : 내무서로 연행된 후 행방불명
직분 : 목사
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유택은 1905년 1월 9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운곡동에서 이퇴계 선생의 후예로 태어났다. 4대독자 유복자로 태어나 한문을 읽다가 14살에 조혼하여 15살에 첫 딸을 낳았다. 그는 예안보통학교에 다니든 중 평양에서 온 김선생이란 자로부터 전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어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유택은 4대독자이지만 예수를 믿는단 이유로 가문회의에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식은 그대로 살려둘 필요가 없다.’하여 처형하기로 결정, 멍석말이를 하고 발로 밟아 처형하는 도중에 "그런대로 쓸모 있는 놈을 그대로 죽이기는 애석하다."하여 중단됐다. 멍석말이에 풀려난 이유택을 보고 있던 문중 어른 중 외삼촌이 신주단지를 모두 끄집어내어 냇가에 던지고 신주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며 “이런 놈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낫을 던져 찍었지만 다행히도 빗나가 목숨을 구했다.

어린 중학생의 몸으로 슬하에 딸 셋이 있었고 문중에 축출을 당해 가족을 먹여 살리랴 학비를 벌랴 갖은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택은 머리가 비상하여 시간에 쫓기면서도 항상 수석을 차지하여 매퀸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매퀸은 이유택을 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유학을 시킬 계획이었지만 김인서장로가 매퀸에게 “길선주목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훌륭한 젊은 전도사를 찾는다.”고 하자 이유택을 소개했다. 이유택은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7년 32회로 졸업한 후 평양노회에서 1937년 목사안수 받고 신현교회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1938년 9월 10일 제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가결시킬 때 이미 금강산수양관에서 10일 동안 주기철, 김화식목사와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이목사는 땅을 치고 울었다.

1938년 농후회사건에 연루되어 주기철목사와 함께 주동자로 몰려 경북 의성 경찰서로 잡혀가 7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았다. 출옥 후 1941년 신현교회는 폐쇄 당하고 남신의주교회에 부임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일제에 의하여 신앙의 용장이 된 이목사는 해방 후 신현교회를 재건함과 동시에 이북5도 연합노회를 결성하는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재건된 신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을 권유받았지만 500명의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어 교회를 사수하다가 1949년 12월 28일 공산당에 의해 문제의 교역자로 검거되었다. 수요일 찬양예배를 마치고 사택으로 가던 중 어둠속에서 나타난 내무서원이 이유택목사를 체포하여 가족이나 교인들에게 작별인사 한마디 못하고 영원히 오지 못할 곳으로 가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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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이유택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