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글성경을 반포한 한국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생년월일 : 1848년 출생지 : 평북 의주 순교일 : 1893년 순교지 : 평양 옥중 직분 : 장로 교단 : 장로교 |
백홍준은 184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진취적인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중국땅 우장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로스(Ross)와 멕킨타이어(Mcintyre)목사를 만남으로 3년 동안 그들에게 과학을 배우고 대신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던 중 그들을 통하여 성령의 뜨거운 감화를 받아 그와 함께 한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와 신앙을 고백하고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로스 목사 지도하에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2년 후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쪽복음서가 문광서원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서'라는 표제를 달고 신약전서가 출간되었으니 최초의 성서인 로쓰번역본이다.
1882년 간행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서간도 한인촌을 찾아가 전도하여 로쓰목사와 앱스터목사를 통해 75명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그리하여 1883년에는 로쓰목사로부터 전도인이란 공식직함을 수여받았다.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성직수여였다.
백홍준은 성경을 풀어 노끈을 꼬아 폐지더미를 묶어서 국경을 넘어 고향 의주에 돌아와 노끈을 다시 풀어 다시 제책을 해서 의주, 강계, 위원, 구성, 삭주 등을 다니며 반 년이 가기 전 10명의 신자를 얻어 그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는 일명 의주교회로서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라는 소래교회보다 1년 앞서 만들어졌다.
1887년 백홍준조사는 언더우드가 그의 사랑방에서 새문안교회를 세울 때 서상륜과 함께 한국교회 최초장로로 안수 받았다.
언더우드가 의주에 왔을 때 그에게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가 1백 명에 달하는 것을 보고 언더우드는 인도자 백홍준장로를 보며 "당신은 한국교구를 위해 하늘에서 파송 받은 천사요"하고 감격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요리문답에 33명이 합격하였고 국법으로 금교함으로 배를 빌려 타고 압록강 건너 만주 땅 안주에서 1889년 4월 27일 세례를 베풀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불리고 있다. 백장로는 한석진, 김이련, 양전백, 김진근 등을 잘 교육하여 목사로 키워 한국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배출했다.
백장로는 만주 봉천을 왕래하며 로쓰목사와 연락을 취했고 1890년에 로쓰목사가 의주로 나와서 그의 집에 유하면서 한 달 이상 백장로의 인도로 의주와 강계지방을 순회전도하였다. 백장로를 길잡이로 하여 여러 서양인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서 관리들은 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다. 그러던 차에 1892년 평안감사 민병석은 백장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죄목은 금교를 전한다는 것이었다.
백장로는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칼을 쓰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몸이 쇠약해져 1893년 옥중에서 45세에 순교하였다. 백홍준장로는 이로써 한국기독교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백홍준은 184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진취적인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에 중국땅 우장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로스(Ross)와 멕킨타이어(Mcintyre)목사를 만남으로 3년 동안 그들에게 과학을 배우고 대신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치던 중 그들을 통하여 성령의 뜨거운 감화를 받아 그와 함께 한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와 신앙을 고백하고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로스 목사 지도하에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2년 후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쪽복음서가 문광서원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서'라는 표제를 달고 신약전서가 출간되었으니 최초의 성서인 로쓰번역본이다.
1882년 간행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서간도 한인촌을 찾아가 전도하여 로쓰목사와 앱스터목사를 통해 75명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그리하여 1883년에는 로쓰목사로부터 전도인이란 공식직함을 수여받았다.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성직수여였다.
백홍준은 성경을 풀어 노끈을 꼬아 폐지더미를 묶어서 국경을 넘어 고향 의주에 돌아와 노끈을 다시 풀어 다시 제책을 해서 의주, 강계, 위원, 구성, 삭주 등을 다니며 반 년이 가기 전 10명의 신자를 얻어 그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는 일명 의주교회로서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라는 소래교회보다 1년 앞서 만들어졌다.
1887년 백홍준조사는 언더우드가 그의 사랑방에서 새문안교회를 세울 때 서상륜과 함께 한국교회 최초장로로 안수 받았다.
언더우드가 의주에 왔을 때 그에게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가 1백 명에 달하는 것을 보고 언더우드는 인도자 백홍준장로를 보며 "당신은 한국교구를 위해 하늘에서 파송 받은 천사요"하고 감격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요리문답에 33명이 합격하였고 국법으로 금교함으로 배를 빌려 타고 압록강 건너 만주 땅 안주에서 1889년 4월 27일 세례를 베풀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불리고 있다. 백장로는 한석진, 김이련, 양전백, 김진근 등을 잘 교육하여 목사로 키워 한국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배출했다.
백장로는 만주 봉천을 왕래하며 로쓰목사와 연락을 취했고 1890년에 로쓰목사가 의주로 나와서 그의 집에 유하면서 한 달 이상 백장로의 인도로 의주와 강계지방을 순회전도하였다. 백장로를 길잡이로 하여 여러 서양인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서 관리들은 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다. 그러던 차에 1892년 평안감사 민병석은 백장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죄목은 금교를 전한다는 것이었다.
백장로는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칼을 쓰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몸이 쇠약해져 1893년 옥중에서 45세에 순교하였다. 백홍준장로는 이로써 한국기독교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