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인 규 ( 崔 仁 圭 , 1881 ~ 1942 )

“ 부끄럽게 변절하기보다는 순교를 선택하다. ”
생년월일 : 1881년 11월 15일
출생지 :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
순교일 : 1942년 12월 16일
순교지 : 대전형무소
직분 : 권사
교단 : 감리교


최인규는 1881년 11월 15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북평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속장, 유사, 권사로서 주일학교교장으로도 봉사하였다. 1932년 천곡교회를 권화선 속장과 함께 개척하여 전도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장로가 없는 교회에 장로역할까지 했다.

자기의 전 재산인 밭 539평과 논 1369평을 천곡교회 대지로 헌납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재목을 운반하는 등 초가 8칸의 예배당 건축에 헌시하여 1933년 봉헌식을 가질 수 있었다. 강대상 3개도 만들어 옥계, 천곡, 북평교회에 기증하였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신앙생활로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선정한 모범신자에 선정되어 1938년 10월 표창을 받았다.

최인규권사는 창씨개명과 일어사용, 황국식민서사를 거부하는 민족주의자였고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로 일제의 억압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40년 5월 일경에 체포되어 박해를 받았다. 함흥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최권사는 재판관 앞에서도 담대히 신앙을 증거하며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일본천황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으로 지인에 불과하다.”고 담대히 말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징역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일본경찰은 불효, 겁탈, 절도를 저지른 죄인에게 '북(똥통)‘을 지게 하는 관습을 이용해 최인규를 회유하고자 하였다. 최인규는 사람들이 모인가운데 "송정리 사람들! 나는 바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요!"하고 북을 진 채 소리치자 군중 속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며 "최인규 만세!"하는 함성이 커졌다. 경찰은 겁이나 사라졌고 북을 지게하자고 의견을 냈던 형사는 시골로 좌천되고 다음 달로 옷을 벗었다. "조센징형사에게 삼척경찰서고등계가 놀아났다"는 소문이 전국경찰서에 나돌았다.

최권사는 고문실로 끌려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해라. 그리고 신사에 절하라."하는 일경으로부터 손톱 밑에 대꼬챙이를 박히고 코에 고춧가룻물이 부이고 하루에 50차례씩 두들겨 맞았다. ‘최권사가 매 맞아 죽는다.’는 소문을 듣고 최권사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송정리사람들이 삼척경찰서로 몰려와 최권사를 치료하기 위해 내달라고 하자 경찰서장은 노발대발하며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어야 돼. 죽이지 않을 테니 돌아가. 다 유치장에 집어넣기 전에."라고 하여 송정동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최인규는 감옥에서도 경찰들의 만류에도 늘 기쁘게 찬송하며 전도하다가 1941년 10월 주로 항일투사, 사상범들이 수용되어 있던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병을 얻었다. "형제 여러분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의 일 하시오. 천국에서 만납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갇힌 지 3년이 되던 1942년 12월 16일 최인규권사는 62세에 대전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최인규권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