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사할지언정 신앙절개를 팔수는 없다 ” 생년월일 : 1902년 8월 27일 출생지 : 경북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순교일 : 1944년 6월 4일 순교지 : 대전형무소 직분 : 목사 교단 : 기장 |
허성도는 1902년 8월 27일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서 부친 허주와 모친 남금수권사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허성도는 모친의 극성스러운 신앙에 힘입어 착실히 교회에 출석하며 성장을 했다. 총명하여 서당훈장으로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받았다. 안동 계남소학교에서 공부했고 1915년에는 안의와선교사가 설립한 계성중학교에 입학해 안의와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았다.
중학교 5학년 재학 시 계성중학 한문선생 남성정교회 이만집목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하고 이목사의 지시를 받아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3월 8일 대구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검속되었다. 허성도는 형장에서 검거되지 않고 뒤에 남아 같은 동료인 김수길, 이영식, 이기명, 이종식 등 동료들과 함께 조선인상인들에게 철시협조공문을 보내고 친일파조선인과 일본관리들에게 경고문을 보냈다.
1919년 4월 18일 결석재판으로 징역10월을 선고받고 체포되어 수형을 살았다.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허성도는 계성학교시절 애국운동뿐 아니라 학생전도대에 소속되어 산간을 전도지를 들고 헤매기도 했다.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사회주의운동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만주, 러시아, 상해 등지를 떠돌아 다녔으나 사회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귀국했다.
이자성의 딸 이목덕여사와 결혼하고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1925년 9월 일본 명치대 영문학부 영문학과에 편입학하여 1927년 가을학기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동경지역소 토목과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야간에 일본신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귀국 경주군 서면 운대리 교회 조사로 공식적인 교역생활에 접어들었고 이듬해 1937년 사월교회로 옮겨 봉직하다가 성직을 떠났다. 1938년 신사참배 가결한 후 환멸을 느껴 목숨보다 귀한 목회를 포기했다.
성직을 떠나 다시 공무원이 되어 충북도청 토목과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청주제일교회 구연직목사에게 발견되어 제2의 소명을 받게 됐다. 194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실시하던 고등성경학교 교수가 되어 성직에 귀임했고 1941년 6월 15일에는 충복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청주 제2교회를 담임해 부임했다. 1943년에는 청주제2교회를 떠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에 연풍교회에 부임했다.
일경은 궁정요배를 강요하고 4복음 이외 사용을 금했으나 허성도목사는 궁정요배를 거부하고 계시록을 본문으로 강해설교를 했다. 교회를 '농민청장년 보충병 양성소'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일경의 요구에 거절하여 체포되었다. 경찰서, 구치소, 충주형무소, 청주형무소,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면서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일경은 며칠씩 굶긴 다음 진수성찬을 차려주며 신사에 절하면 먹어도 좋다고 했지만 허성도목사는 다니엘의 신앙으로 “죽을지언정 우상에 바쳐진 제물은 먹을 수 없다.”며 순교하였다.
1) 저자 : 김요나

출판사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발행일 : 1995-04-10
판형 : 신국판
페이지수 : 384 page
ISBN :
상품코드 : X0002
허성도 목사 미리보기
어머니의 인도로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여 두드러진 활동을 하게 된다. 신앙심이 뜨거워 이름도 도에서 성도로 바꾸고 주를 위해 제단에 몸을 바치겠노라고 다짐한다. 계성학교 재학 중 3.1 만세 운동으로 복역하였고, 연세 전문을 다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잠시 빠져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시도해 보았고 만만치 않아 러시아로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양의 길로 접어들었다. 연풍 교회 시무중 체포되어 고난을 받았고 만기 출소 직전 독살 당했다.
허성도 목사(목차)
제1장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마음
제2장 원대한 꿈의 유학과 시련
제3장 목양의 길, 십자가의 길
제4장 유족과 추모의 변
부록
허성도는 1902년 8월 27일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에서 부친 허주와 모친 남금수권사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허성도는 모친의 극성스러운 신앙에 힘입어 착실히 교회에 출석하며 성장을 했다. 총명하여 서당훈장으로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받았다. 안동 계남소학교에서 공부했고 1915년에는 안의와선교사가 설립한 계성중학교에 입학해 안의와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았다.
중학교 5학년 재학 시 계성중학 한문선생 남성정교회 이만집목사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하고 이목사의 지시를 받아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3월 8일 대구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검속되었다. 허성도는 형장에서 검거되지 않고 뒤에 남아 같은 동료인 김수길, 이영식, 이기명, 이종식 등 동료들과 함께 조선인상인들에게 철시협조공문을 보내고 친일파조선인과 일본관리들에게 경고문을 보냈다.
1919년 4월 18일 결석재판으로 징역10월을 선고받고 체포되어 수형을 살았다.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허성도는 계성학교시절 애국운동뿐 아니라 학생전도대에 소속되어 산간을 전도지를 들고 헤매기도 했다.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사회주의운동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만주, 러시아, 상해 등지를 떠돌아 다녔으나 사회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귀국했다.
이자성의 딸 이목덕여사와 결혼하고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1925년 9월 일본 명치대 영문학부 영문학과에 편입학하여 1927년 가을학기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동경지역소 토목과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야간에 일본신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귀국 경주군 서면 운대리 교회 조사로 공식적인 교역생활에 접어들었고 이듬해 1937년 사월교회로 옮겨 봉직하다가 성직을 떠났다. 1938년 신사참배 가결한 후 환멸을 느껴 목숨보다 귀한 목회를 포기했다.
성직을 떠나 다시 공무원이 되어 충북도청 토목과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청주제일교회 구연직목사에게 발견되어 제2의 소명을 받게 됐다. 194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실시하던 고등성경학교 교수가 되어 성직에 귀임했고 1941년 6월 15일에는 충복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청주 제2교회를 담임해 부임했다. 1943년에는 청주제2교회를 떠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에 연풍교회에 부임했다.
일경은 궁정요배를 강요하고 4복음 이외 사용을 금했으나 허성도목사는 궁정요배를 거부하고 계시록을 본문으로 강해설교를 했다. 교회를 '농민청장년 보충병 양성소'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일경의 요구에 거절하여 체포되었다. 경찰서, 구치소, 충주형무소, 청주형무소,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면서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일경은 며칠씩 굶긴 다음 진수성찬을 차려주며 신사에 절하면 먹어도 좋다고 했지만 허성도목사는 다니엘의 신앙으로 “죽을지언정 우상에 바쳐진 제물은 먹을 수 없다.”며 순교하였다.
1) 저자 : 김요나
출판사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발행일 : 1995-04-10
판형 : 신국판
페이지수 : 384 page
ISBN :
상품코드 : X0002
허성도 목사 미리보기
어머니의 인도로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여 두드러진 활동을 하게 된다. 신앙심이 뜨거워 이름도 도에서 성도로 바꾸고 주를 위해 제단에 몸을 바치겠노라고 다짐한다. 계성학교 재학 중 3.1 만세 운동으로 복역하였고, 연세 전문을 다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잠시 빠져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시도해 보았고 만만치 않아 러시아로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양의 길로 접어들었다. 연풍 교회 시무중 체포되어 고난을 받았고 만기 출소 직전 독살 당했다.
허성도 목사(목차)
제1장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마음
제2장 원대한 꿈의 유학과 시련
제3장 목양의 길, 십자가의 길
제4장 유족과 추모의 변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