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용 학 ( 趙 鏞 學 , 1904 ~ 1940 )

“ 해운대의 순교용장 ”
생년월일 : 1904년 7월 13일
출생지 : 경남 양산군 양산면 중부동 354번지
순교일 : 1940년 8월 14일
순교지 : 경남 김해시 진영 북산철도병원
직분 : 영수
교단 : 장로교


조용학은 1904년 7월 13일 경남 양산군 양산면 중부동 354번지에서 한학자인 부친 조영규와 모친 곽수정 사이에서 3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 밑에서 성장하였다. 호주선교부 함열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고 1923년 7월 23일 모친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모친은 어린 시절 남장으로 한학교육을 받았고 입신 후에는 양산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부임, 문맹퇴치에 앞장섰던 선각자적 교육자였다.

조용학은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문체도 뛰어나고 사색을 즐겨 일기를 써서 남겼는데 새벽기도 전에 냉수마찰을 하고 기도 후에는 성경을 읽었다. 당시 양산교회 평양신학교 재학하던 주기철전도사의 지도하에 영향을 많이 받아 경남 성경학교에 진학했다. 초량교회 청빙을 받아 간 주기철목사는 조용학을 잊지 않고 그 교회를 설립한 신상익장로의 차녀 신차영과 중매를 해 1927년 12월 3일 주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1928년 3월 17일 조용학은 성경학교졸업과 함께 호주선교부 부산시찰로부터 울산, 언양 등 3개 지역교회 순회전도사로 1938년 5월 14일 발령받아 목회일선에 뛰어들었다. 신명을 다해 교회를 섬기던 중 '7좌사건'(이단으로 비판을 받는 백남용목사를 모시고 사경회를 하는 대지교회에 참석한 7조사가 경남노회로부터 파면조치를 당한 사건)에 갈등을 느낀 조용학은 전도사직을 사퇴하고 조탈공장과 염색공장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돈을 벌 목적보다는 조만식선생의 물산장려운동에 호응하려는 의도가 컸다.

조용학은 주시경의 한글맞춤법연구와 보급운동을 펼쳤고 장인 신장로와 함께 가정처소에서 지영읍교회를 창립하고 영수가 되어 담임교역자로 10년을 봉직하였다. 그러던 중 고등계형사들의 갖은 회유에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설교노트를 검열 받고 프락치가 사택에 배치돼 꼬투리를 잡혀 투옥돼 목검으로 머리를 맞는 검도연습고문을 당했다.

회유책으로 풀려나 휴양하던 중 1940년 일경은 회복되지도 않은 조용학전도사를 다시 검속, 검도로 내리쳐 두부가 깨어져 혼수상태에 이르자 가족들에게 내어주어 철도병원에 입원되었다. 일주일 사경을 헤매다 4남 조윤재가 새벽에 태어나던 1940년 8월 14일 정오 조용학영수는 37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