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연 세 ( 朴 淵 世 , 1883 ~ 1944 )


“ 신사참배를 반대한 옥중 순교자 ”
생년월일 : 1883년
출생지 :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순교일 : 1944년 2월 15일
순교지 : 대구형무소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박연세(朴淵世)목사는 1883년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에서 대대로 농토를 일구어 온 박자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농사를 도우며 인근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군산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전킨(W. M. Junkin)[개명 전위렴]이 세운 영명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후 박연세는 당시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에 있는 신명학당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이리 고현교회와 군산 구암교회에 출석, 봉사하였고,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26일,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니던 영명학교 출신 제자 김병수(金炳洙)가 찾아와 서울의 만세 운동에 관한 동향을 알리고, 28일 다시 내려와 비밀리에 독립선언문 95매를 전해 주었다. 이 독립선언문은 세브란스병원 제약실에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김병수에게 군산 지역 연락 책임을 맡겼으며, 김병수가 스승이었던 박연세를 찾아가 전달한 것이다.

박연세는 같은 학교 교사 이두열(李斗烈)·김수영(金洙榮)·송정헌 등과 함께 만세 운동 준비에 돌입하였으나, 거사 전일인 3월 5일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운동은 그대로 전개되어 3월 20일 1천여 명의 횃불 시위로 이어졌으며, 4월 4일에는 1만여 명이 모인 이리역전 시위로 번져 갔다. 결국 박연세는 「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대구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그 뒤 박 목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전주서문,목포양동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며 4번이나 전남노회장을 지내고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또 양동교회에서 여러 교회를 분립하는 데 앞장섰다. 1927년 7월 죽교리교회, 1929년 연동교회, 1933년에는 중앙교회를 분립시켜 복음을 확장시켜 나갔다.

박연세 목사가 전남노회장으로 있던 1938년 제30회 전남노회 때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된다. 군산지역에서 3·1운동을 지휘했던 박연세 목사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주일 설교 시 ‘약육강식’을 제목으로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규탄하는 내용의 설교를 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게 되면 천황도 심판 받는다’라는 의미의 설교를 통해 천황을 신성모독한 죄로 1942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목포 경찰서에 수감된다. 1년 형을 확정 받아 대구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1944년 2월 15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추운 겨울날 감방에서 순교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