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 심 ( 李 淨 心 , 1901 ~ 1947 )


“승려에서 위대한 순교의 제물이 된 목사”
생년월일 : 1901년 7월 10일
출생지 : 경상남도 부산
순교일 : 1947년 12월 8일
순교지 : 함경북도 청진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이정심 목사는 1901년 7월 10일 부산에서 이남길과 윤차숙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그는 13세에 모친을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고학을 해서 부산진공립보통학교와 원공사라는 2년제 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원공사를 졸업하던 해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슴에서 끓어 넘치던 이정심은 19세의 젊은 나이에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1심에서의 검사의 구형은 징역 6개월이었다. 그때 그는 피고석에서 벌떡 일어나 이런 발언을 했다. “내 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 부른 게 왜 죄가 되는가? 내가 만약 천황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활보했어도 이 법정에 세웠겠는가? 진리를 억압하는 국가는 망했다, 일본의 멸망도 멀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 발언으로 법정 모독죄까지 추가되어 선고 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다. 죽더라도 비굴하지 않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정심은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해서는 삶의 무상함을 느껴 곧바로 절간으로 들어가 수도했다. 정심은 그때 받은 법명이요, 본명은 이소절(李小節)이었다. 그런데 그는 환속해서도 계속 이정심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정심은 4년동안 불도를 닦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신심이 없었다. 그래서 환속했다. 그가 환속하여 집에서 어정거릴 때 보통학교 친구인 김상운을 만났다. “아니,자네 중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왜 절간에 안 있고 속세에 묻혀사나?" “중질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더구먼” “아무나라니?" “끈기가 있어야 된다는 말일세, 난 아무래도 세속이 좋더구만” “허허허,타락한 중이여!” 둘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데 김상운은 마침 교회를 가고 있었다. 그는 부산진교회 집사였다. 죽마고우인 둘은 김상운의 인도로 정심을 교회로 인도했고, 이런 인연으로 정심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정심은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후에 서울로 올라와 피어선성경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마침 후원자가 나타나 성경학교를 마치고 평양신학교까지 수학했다. 그래서 1933년 평신 28회로 졸업했다. 이정심은 졸업을 하면서 유치원 교사인 주애희와 결혼을 했다. 33세 만혼이었다.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나병원의 전도목사가 되어 3년간 나환자 목회를 했다. 특수 목회인 나환자 목회는 사명자가 아니면 안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해야 된다. 그는 손가락 발가락이 끊어져 냄새가 나는 환자들을 성심 성의껏 3년을 목회하다가 1936년 통영 교회로 옮겨가 목회를 했다. 이정심 목사는 목회자이면서 부흥사였다. 그가 사경회를 인도할 때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 방언, 통역,병 고치는 은사가 많이 일어났다. 전주지역 사경회를 인도할 때였다. 이 목사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며 아픈 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각종 병자가 치유를 받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나 지팡이를 버리고 돌아가는 역사가 있었다. 김해에서는 이 목사를 주일학교 교사강습회 강사로 모셨을 때 너무 은혜가 불같이 내려 부흥회로 바꾸고 집회 기간을 한 주간을 연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정심 목사가 통영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은 일제가 신사참배를 집요하게 강요하던 시대였다. 기독교학교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단정했기에 폐교 조치하며 저항했고,교단적으로는 승복했지만 개교회 목사들은 목이 잘려도 신사에는 절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목사도 적지 않았다. 이정심 목사도 그런 목사였다. 그는 경찰서 고등계에 수시로 불려 다니며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만주로 옮겨갔다. 1941년이었다. 고통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순수 믿음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정심 목사는 훈춘교회를 맡아 담임하다가 그곳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더불어 많은 교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정심 목사도 청진중앙교회의 초청을 받고 함경북도 청진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이내 북녘땅은 공산당이 강점하고 기독교를 어용화 하려는 강약욱 일당들의 모략으로 기독교도연맹이 결성되었다. 기독교도연맹은 어떻게 하든간에 모든 목사들을 포섭하려고 했다. 교역자들은 기독교도연맹의 음모를 모를 리 없었다. 공산당은 교역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회유도 하고 협박도 했다. 그 통에 많은 교역자들이 입회원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이정심 목사는 달랐다. 훈춘교회에 시무하며 공산당의 횡포를 직접 겪어봤기에 공산당 자체를 좋게 볼리 없었다. 그는 기 독교사회 민주당 청진군 당위원장직을 수행하며 기독교도연맹과는 인연을 맺지 않았다.

이정심 목사가 청진중앙교회 당회장 겸 기독교사회민주당 도당위원장직을 겸직하고 있을 때였다. 자기를 공산당 청진지구에 근무하는 자라고 밝힌 이가 북한 주둔군 사령부의 이바노프 대좌를 데리고 나타났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정심 목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바노프와 이정심은 손을 맞잡았다. 이 목사는 거구라서 손이 큰 편인데 이바노프는 이 목사보다 손이 더 컸다. 천천히 손을 놓은 이 목사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저를 찾아오셨을 때는 용건이 있어서 오셨을텐데” “제 용건은 일제 군벌이 쫓겨간 이 나라를 공산당 인민공화국으로 건설하려고 하니 협조해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제게 협조를?" “그렇습니다” 이 목사는 정색을 했다. “보다시피 저는 정치인도 사업가도 군인도 아닌 목사입니다, 목사가 사회주의 건설에 무슨 힘을 보태겠습니까" “이 목사는 지금 기민당이란 정치 단체를 이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민당은 정치 단체가 아닙니다. 선교단체입니다. 이바노프 같은 이를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역사적 책임을 지는 단체입니다” 이바노프는 쓴 웃음을 웃었다. 이바노프의 부탁은 이정심에게 받아들여지 않았다. 그는 직접 찾아와 협조를 구했으나 면전에서 거절 당하고 나와야 했다. 

계속되는 공산당의 공포정치는 북한 교회의 숨통을 막을 것만 같았다. 이때 김상순 목사가 부산에서 올라왔다. “이봐 이 목사,우리 부산으로 가자구. 우린 청진사람이 아니야. 부산에서 다시 시작하자구” 그러나 이 목사는 꿈적도 안했다. “어떻게 나 혼자 살겠다고 교회와 양떼를 버리고 도망치겠나. 다른 교역자가 내 자리를 메꾸어주면 모를까” 이정심 목사는 월남을 거부했다. 

한편 이 목사에게 협조를 거부당한 이바노프 대좌는 이 목사를 테러할 앙심을 먹고 있었다. 1947년 그 해 12월로 접어들어서였다. 건장한 청년들을 시켜 심방에서 돌아오는 이 목사를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청년들은 저들이 사용하는 비밀 밀실로 끌고가 4일 간을 굶기며 두들겨 팼다. 몸이 건장한 이 목사도 견뎌내지 못하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바노프는 인적이 드문 새벽녘 이 목사를 청진중앙교회 사택 앞에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 목사는 가족들에 의해 집안으로 모셔져 이불을 쓰고 누웠지만 좀체 깨어날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저녁 때에야 눈을 반짝 떴다. 그는 아들의 손을 틀어쥐며 유언을 쏟아 놓았다. “천국이 보인다. 황금보석 꾸민 저 천국이 보인다 . 나를 위해 찬송을 불러다오” 가족들은 하늘가는 밝은 길을 울면서 불렀다. 이 목사는 밝은 얼굴로 그 찬송을 다 듣고는 띄엄띄엄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너는 내 뒤를 따르라. 그리고 내 시신은 고향 땅에 묻어다오! 아들아 유언장은 이미 작성해 내 성경책 속에 끼어 놓았다." 이 목사는 이 말을 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947년 12월 8일이었다. 그의 재산은 교회와 부산의 나병원,그리고 나머지는 자식들에게 분배 돼 있었다. 이 목사는 가족들의 오열 속에 슬픔과 눈물이 없는 평화의 나라를 꿈꾸며 순교 반열에 들었다. 이때 이 목사의 나이 4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