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창 실 ( 李 昌 實 , 1890 ~ 1949 )

“ 하나님과 겨레를 함께 사랑한 주의 종 ”
생년월일 : 1890년 4월 21일
출생지 :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송학리
순교일 : 1949년 4월
순교지 : 남부교회시무 중 내무서원에게 검거 연행되어 총살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이창실은 1890년(경인) 4월 21일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송학리에서 이영기씨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 시 한문서당에서 수학하였다. 송천교회 설립한 해서제일학교에 입학 하여 학예회, 토론회 연설회를 하면 매번 일등연사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어 소래에 있는 금세학교를 졸업한 후 풍천양재학교 교사로 4년, 광선학교에서 5년을 근무하였고 1917년부터 전도사에 임명되어 송학교회, 금곡교회, 진목교회를 시무하다가 1918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신학교 2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 은율로 돌아와 3.1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장연경찰서에 체포 구금당해 온갖 고역을 치룬 후 출옥했다.

1920년 구월산대-독립혁명군 사건에 연루되어 밀정에 의해 대장 등 7명이 전사당하고 교회지도자 24명이 고발당하여 쑥대밭이 되는 위급한 상황에서 쫒기는 몸이 되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군관학교에 입학 제2회로 졸업하였다.

1921년 8월 32세의 나이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3월 16일 풍천장날 시장중앙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선두시위하며 독립만세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항일투사들과 구월산 구엽사 지하실을 열락본부로 정하고 상해 임정과 연락인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고 상해 임정에 들어가 광복군에 입대 훈련받고 무력항쟁에 밀명을 받고 은률로 잠입해 시민들 앞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송화 지구에서 활약하였다. 일본군과 교전 끝에 체포당해 7년형을 받고 해주, 평양, 서울, 마포 등지 형무소에 수형생활을 하다가 1925년 9월 대정가에 경사로 특사 운운하며 5년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석방했다.

1927년 해창교회 전도사 4년, 1930년 재영읍교회 전도사 4년, 1934년 재령군 북율면 거실포 교회 시무 중 평양신학교에 복학, 1935년 3월 평신을 28회로 졸업하고 동 4월에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2월에 거실포교회에 위임목사로 취임하니 46세로 18년 만에 졸업을 하였다. 1940년에 남천읍에 장로교회를 세우고 목회하였으나 독립군이라는 전직이 따라붙어 항상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한때 군민들의 원에 의하여 평산군수로 지낸 적이 있다. 해방을 맞아 사리원 남부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을 거부하고 월남하지 않고 끝까지 강단을 지키다가 1949년 4월 부활절예배를 마치고 공산당 내무서의 문제교역자 검거령에 의해 연행되었다. 공산군은 독립운동가라면 대접을 해 주어야 할 이창실목사를 오히려 ‘항일투쟁 경력 때문에 살려둘 수 없다.’하여 체포된 즉시 50세에 총살 순교하였다.

순교자이창실목사 순교비와 손자 이응삼몸사

북조선 화가가 그린 남천읍교회

순교자 이창실목사의 손자 이응삼목사 가족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이창실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