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기 주 ( 林 崎 周 , 1896 ~ 1947 )

“ 재령 서부교회와 순교자 ”
생년월일 : 1896년 11월 19일
출생지 : 평안남도 순천군 지산면 지탄리
순교일 : 1947년 5월 주일
순교지 : 1947년 5월 주일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임기주는 1896년 11월 19일 평안남도 순천군 지산면 지탄리에서 임세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숭실중학교 졸업, 1923년 숭실전문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졸업 후 전남 순천에 있는 매산학교로 발령받아 교사로 취임하였다. 1929년까지 6년간 봉직하였다.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2년 27회로 졸업 후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 받고 정주 오산교회에 부임하여 7년을 봉직했다.

1938년 2월 평북노회는 전국 30개노회 중 제일 먼저 노회적으로 신사참배안을 가결하고 그 안을 총회에 상정시켰다. 임기주목사는 노회결의에 반대하다 수감되어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9년 재령읍 서부교회로 옮겨 목회생활에 전념했다.

1944년 황해노회장을 역임한 임목사는 해방직전 사상범으로 검속에 걸려 해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심한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1945년 해방 후 평양신학교가 개교되었고 임목사는 평양신학교의 교수직을 수행하며 후배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공산당에 투쟁하여 두 차례 투옥되었다.

1947년부터 공산당은 주일선거에 비협조자들과 기독교도연맹에 미가입자들과 앞으로도 계속 협조할 가망이 없는 자들을 체포해 아오지탄광으로 보내는 등 일대 검거에 나섰다.

1947년 5월 어느 주일 아침 임목사는 시편 2편을 교독문으로, 시편 58편을 본문으로 하여 ‘재판관들이 타락하여 하나같이 굽은 판결을 하고 있는데 이런 불의한 자를 하나님이 방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판의 채찍을 들고 그들의 불의를 견책하실 것이다.’라는 설교를 마지막으로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교인들에게 인사하던 임목사는 두 내무서원들의 팔에 끌려 잡혀간 후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