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창 섭 ( 林 昌 燮 , 1901 ~ 1950 )

“ 애국혼에 살던 안악교회의 애국지사 ”
생년월일 : 1901년 4월 6일(음)
출생지 :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신장리
순교일 : 1950년 수복 북진 중 체포됨
순교지 : 아오지탄광 중 병사 또는 해주형무소 옥사
직분 : 장로
교단 : 장로교 합동


임창섭은 1901년 4월 6일(음)황해도 안악군 안악읍에서 한의사였던 임경주영수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창섭의 부친 임경주는 안악에서 의사로 개업하고 있던 중 당시 이 지역을 순방했던 이길함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어 안악읍교회 전신인 귓담교회 창설멤버가 되었다. 귓담교회는 후에 안악읍교회로 개명되어 초등교육기관인 안신학교를 개교했다. 임창섭은 안신학교를 나온 후 다시 부유층 자녀들만 입학하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진학하게 되었으나 양약에 밀려 한약방이 문을 닫게 되자 가산이 파탄되어 1919년 중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임창섭은 중퇴로 인해 슬퍼할 겨를도 없이 3.1만세운동에 연루되어 1919년 3월 7일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8개월 복역 후 출감했다. 모두들 상해로 망명가는 상황에서 상해에 있는 김구주석의 권유로 임창섭은 상해에 가지 않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숭실학교 시절 배워둔 양복기술로 고향에서 양복점을 개업했다. 임창섭이 젊음의 기개를 죽이고 양복쟁이로 전락한 것은 김구주석의 권면에 뒤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기우는 가세를 장남으로서 일으켜 세워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섯 명의 동생은 형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에 모두 공부를 하게 되었고 8남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임창섭은 11월 장로안수 받았고 교우들을 중심으로 기독교동우회를 조직해서 기독교사회운동 단체로 공산주의에 대항하였다. 그래서 기독교동우회 이름으로 교회에서는 성경학교를 개설해 성경을 공부시켰다. 1946년 2월 기독교동우회는 금주, 금연운동을 전개하고 4백여 회원들은 시가지를 행진하며 외형상 금주, 금연운동을 하였다. 이는 공산군에게 보이기 위한 일대 시위였다.

동우회 회장인 임창섭은 내무서원의 집요한 사찰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고 은밀하게 기독교사회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지하 밀실에서 남한방송을 청취하고 주민들에게 삐라를 만드는 등 기독교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11월 24일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주석을 만나기 위해서 단신 월남해서 김구주석으로부터 모종의 지령을 받아 안악으로 돌아와 1948년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대단체인 한독당 안악지부를 결성하고 총책을 맡았다.

1950년 수복 북진 중 청년동지 조용섭과 김유각 등 3.8선을 넘다가 내무서원들에 연행되고 이 사건은 안악군에 바람을 일으켰다. 임장로도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체포되었고 후일 임장로는 해주형무소로 이송되어 70명의 동지들과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 때 임장로는 동지들에게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시오 모두 내 명령에 따랐다고 하시오." 동지들 대개는 석방되고 임창섭, 강병모, 강복균 셋만이 남았고 이들은 이후 아오지탄광에서 중노동 중 병사했다고 하기도 하고 고문으로 옥사했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