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병 무 ( 1888 ~ 1949 )


“언제나 흔들림 없이 교회를 사랑한 목사”
생년월일 : 1888년
출생지 : 경상북도 울진
순교일 : 1949년 10월 7일
순교지 : 경상북도 울진
직분 : 목사
교단 : 침례교


행곡리에서 태어난 전병무(1888-1949) 목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모르는 한자가 없을 정도여서 '옥편'이라고 불렸다. 1909년 2월, 22세 되던 해에 전도인 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29세 되던 1916년 순교자 전치규 목사의 형님인 전치현 씨의 주선으로 펜윅 선교사가 하던 성경공부 반에 들어갔다.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여기서는 '성경 옥편'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목사가 된 그는 목회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을 쏟았고, 특히 천국에 대한 약속은 더없이 큰 소망이요, 삶의 목적이라고 외쳤다. 고향 교회를 건축할 때 건축비 전액을 헌금하였는데 "천국에다 예치시키는 것이다"라며 자기 믿음을 보이기도 했다. 일제의 교회 탄압은 날로 더해져 고향을 등지고 간도와 만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가족들도 만주로 이민가기로 결정하고 장남인 전부흥이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끝내 거절하고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혼자 남아 교회를 지켰다.

그러던 1942년 6월, 교단 대표 32명이 원산감옥에 구속될 당시 함께 투옥되어 1944년 5월 출감했다. 옥살이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풀뿌리로 연명하면서도 폐허가 된 교회당을 정리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이후 1944년 일제(日帝)의 교단 해체령에 따라 예배와 집회가 금지된데 이어 교회가 폐쇄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기독교 사상 최악의 시련기가 닥쳐왔지만, 8.15 해방과 더불어 학원 설립과 후진양성 등 기독교단 재건에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49년 제39회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울릉도, 울진 두 구역으로 파송되어 순회목사로 봉직하였다.

당시 울진은 공산당의 활동 본거지였다. 이들은 전 목사를 저격 대상으로 삼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교인들이 전 목사를 피신시키려 하였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목회 본분에만 충실히 전념하였다. 1949년 10월 7일, 울진 행곡교회에서 저녁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들이닥친 빨치산들에 의해 남석천 성도의 집으로 끌려가 그와 함께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