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저항불복종투쟁을 한 민족운동의 횃불 ” 생년월일 : 1883년 2월 1일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군 순교일 :1950년 순교지 : 평양 직분 : 장로 교단 : 장로교 |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 평양 진향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당대의 선비로 어려서부터 한학자 장정봉 문하에서 수학했다. 15세 전에 사서삼경을 마치고 관직보다는 대상의 길을 가기 위하여 포목상을 경영하였다.
1894년 하학동문인 한정교의 적극적인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어 즐겨하던 술, 담배를 끊었다. 이듬해 사업을 정리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오꾜 세잇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28세에 미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정익로, 백남훈, 김저익 등과 1909년 동경 YMCA 회관에서 정식 설립된 도쿄 한인교회 창립멤버로 수고하여 초대영수로 활약했다. 조만식영수는 장감 양교파연합교회로 운영되는 전통을 만들었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여 도미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고 이승훈선생의 요청으로 월급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민족학교 오산중학교교사로 부임해 교감을 거쳐 1915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1919년 3.1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교장직을 물러나기까지 5년간 교장이자 교사이자 사감이자 급사로서 봉사했다. 3.1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다시 부임했으나 일경의 불승인으로 평양 YMCA총무가 되어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이루지 못했다.
1926년 숭인상업학교 교장을 맡던 중 그해 융희황제의 국상을 당해 6.10만세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영 교단에서 쫓겨났다. 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중앙위원 겸 평야지회장으로 활동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조영수는 정관서 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 원기를 북돋았고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장에 취임하였다. 백선행기념관과 인정도서관을 개설하고 한인사회소송사건을 맡았다.
1937년 창씨개명 반대. 학병지병격려강연 강요거부. 조선군사령관 이다가끼대장과의 면담거부 등으로 강서로 피신하여 숨 막히는 생활을 하다가 8.15를 맞았다. 1950년 8월 17일을 기해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를 강요받았으나 거절하고 그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결성했지만 1년도 전에 와해되고 신
탁통치지지성명을 내라고 강요받았지만 거절하자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조선민주당 청년당원들이 조장로를 구출하기 위해 침입했을 때 조장로는 무저항불복종투쟁으로 구출되기를 거절했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심장병이 악화되고 늑막염까지 겹쳐 병원에 이송되었다. 이 시기에 조만식장로는 공산당에게 학살되어 68세에 순교하였다.
조만식은 1883년 2월 1일 평양 진향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당대의 선비로 어려서부터 한학자 장정봉 문하에서 수학했다. 15세 전에 사서삼경을 마치고 관직보다는 대상의 길을 가기 위하여 포목상을 경영하였다.
1894년 하학동문인 한정교의 적극적인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어 즐겨하던 술, 담배를 끊었다. 이듬해 사업을 정리하고 숭실중학교에 입학,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오꾜 세잇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28세에 미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정익로, 백남훈, 김저익 등과 1909년 동경 YMCA 회관에서 정식 설립된 도쿄 한인교회 창립멤버로 수고하여 초대영수로 활약했다. 조만식영수는 장감 양교파연합교회로 운영되는 전통을 만들었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여 도미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고 이승훈선생의 요청으로 월급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민족학교 오산중학교교사로 부임해 교감을 거쳐 1915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1919년 3.1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교장직을 물러나기까지 5년간 교장이자 교사이자 사감이자 급사로서 봉사했다. 3.1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다시 부임했으나 일경의 불승인으로 평양 YMCA총무가 되어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이루지 못했다.
1926년 숭인상업학교 교장을 맡던 중 그해 융희황제의 국상을 당해 6.10만세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영 교단에서 쫓겨났다. 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중앙위원 겸 평야지회장으로 활동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조영수는 정관서 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 원기를 북돋았고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장에 취임하였다. 백선행기념관과 인정도서관을 개설하고 한인사회소송사건을 맡았다.
1937년 창씨개명 반대. 학병지병격려강연 강요거부. 조선군사령관 이다가끼대장과의 면담거부 등으로 강서로 피신하여 숨 막히는 생활을 하다가 8.15를 맞았다. 1950년 8월 17일을 기해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를 강요받았으나 거절하고 그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결성했지만 1년도 전에 와해되고 신
탁통치지지성명을 내라고 강요받았지만 거절하자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조선민주당 청년당원들이 조장로를 구출하기 위해 침입했을 때 조장로는 무저항불복종투쟁으로 구출되기를 거절했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심장병이 악화되고 늑막염까지 겹쳐 병원에 이송되었다. 이 시기에 조만식장로는 공산당에게 학살되어 68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