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택 규 ( 崔 宅 奎 , 1902 ~ 1949 )

“ 이북 5도연합노회를 이끈 평동노회장 ”
생년월일 : 1902년 2월 8일
출생지 : 평북 선천군 수청면 고읍리 217
순교일 : 1949년 12월 19일
순교지 : 평북 정주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최택규는 1902년 2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고읍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문을 읽었고 고향마을 소학교를 거쳐 평양으로 나가 1916년 숭실중학교와 1921년 평북선천신선중학교, 1923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최택규는 신학교시절인 1923년부터 1929년까지 평북 의주 고관읍 삼광학교의 교편을 잡았다. 이후 직접 선교에 투신하고자하여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수구교회 조사로 섬기며 평양신학교를 다녔다. 1941년 평양신학교를 제34회로 졸업한 최택규는 평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덕흥교회, 덕성교회, 의언교회에서 순회목사로 1948년까지 시무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북교회는 5개 노회가 연합노회를 형성하여 통일될 때까지 자체적으로 총회역할을 하고자 할 때에 평동노회장직을 봉직하던 최택규목사의 역할도 지대했다. 1946년 11월 3일에 실시된 주일선거는 ‘교회의 힘이 과연 공산정권에게 얼마나 미치겠느냐는 것’이었다. 최목사는 주일선거 대책위원대표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어 노회장들을 통해 교회에게 주일사수를 통첩했다. 이로서 저조한 투표율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날 최목사는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성경은 에스더서 4:1-17이었고 설교제목은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것이었다. 최목사는 무장하여 교회로 뛰어든 공산당 내무서원들로부터 교회강단에서 끌어내려져 연행되었다.

주일선거사건이후 최목사는 내무서의 요시찰인물이 되어 정치보위부요원이 덕흥교회에 상주되었고 목사의 프로그램 전체를 감시받으며 최목사의 행동하나까지도 정치보위부에 보고가 되었다. 최목사는 끝내 덕흥교회를 사임했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평북 정주군 평동중고등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1948년 정주중앙교회로 자리를 옮겼고, 1947년, 1949년까지 평양신학교 실행이사로 역임하고 1948년 평동노회의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낮에는 신학교에서 교수를 하고 수요일과 주일날만 교회에 나와 1948년 갈산면 고읍교회, 1949년 정주읍 중앙교회에서 설교를 담당했다.

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당국과 기독교도연맹은 고집스러운 최목사를 회유하려 신학교 선후배를 동원해 협박까지 하였으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1949년 12월 19일 무장한 정치보위부원이 교회사택으로 찾아왔다. 공산당 정치보위부는 회유 불가능한 종교지도자들을 1949년 말을 기해 체포해 숙청시킨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최택규목사도 ‘회유불가’의 도장이 찍혀 진눈개비가 내리는 날 연행되어 평양형무소에 갇혔다가 6.25가 일어나기 전 처형되어 48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