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모의 사랑으로 운반된 역사유물” 생년월일 : 1906년 출생지 : 평양 선교리 순교일 : 1947년 4월 순교지 : 해주앞바다 직분 : 사모(김양선목사) 교단 : 장로교 |
한필려는 1906년 평양 선교리에서 고무신공장을 경영하는 한상호씨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신유치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때 한필려는 김양선을 만나 결혼했다. 김양선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어려운 신학생을 만나 생활을 꾸려나가려니 핍절했다.
거기에다 김양선은 사학자로서 기독교사료만 보면 돈을 꾸어서라도 사서 수집했다.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슈셩교젼셔', 최초의 찬송가인 ‘찬양가’, ‘찬성시’, 최초의 교회신문인 그리스도인 신문 등이 김양선이 신학교시절 수집한 것이었다. 김양선은 기독교사료 뿐만 아닌 일반 희귀사료도 수집했다. 병인양요 때 대원군이 어용희장군에게 보낸 전쟁지휘서 100통, 홍경래난 때 정부 쪽 기록인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같은 것이 그것이다. 김양선은 선교사들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구문사료까지 어렵게 수집했다.
1943년 목사가 된 김양선은 섬기던 정주중앙교회에서 신사참배문제로 쫓겨났다. 김목사는 정주중앙교회 당회장자리에서만 축출된 것이 아니다. 목사의 생명인 강도권(講道權)도 박탈당했고 금족령까지 받았다. 일제가 김양선에 대하여 이렇듯 가혹했던 것은 전문학교 시절부터 ‘청주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한 경력 때문이었다. 김목사는 그로 인해 옥고까지 치렀다.
김목사가 평북 구성에 있는 신시까지 들어가 해방 때까지 은둔생활을 한 것은 한필려사모의 조언 때문이었다. 한사모는 신시에 움막을 짓고 농사도 하고 외양간도 만들어 가축도 길렀다. 신시는 얼마나 산골짜기였던지 맹수가 출몰해 양들을 약탈해가 한사모는 밤잠도 자지 못하고 양떼를 지킬 때가 많았다.
한사모는 김목사가 생명만큼이나 귀중히 여기는 사료들을 소중히 보관했다. 3.1운동 때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사진 30매는 베개 속에 넣었고 안중근의사의 옥중 육필과 태극기는 이불 속에 감추었다. 폐교당한 숭실학교의 대리석간판은 다리미판 같이 만들어 보관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김목사가 수집한 대개의 기독교사료들이 북한에 있었다. 한사모가 자원하여 3.8선을 넘어가 귀중한 문헌들을 운반해왔다. 두 번째도 월북해 자료를 가지고 무사히 넘어왔다. 그러나 1947년 들어서는 3.8선 경비가 강화되어 있었고 한사모가 자료들을 머리에 이고 해주앞바다에서 막 배에 발을 들어 밀었을 때 인민군경비병이 나타나 따발총을 갈겨댔다. 한사모는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의료시설 하나 없었던 배안에서 숨을 거뒀다. 한사모는 죽어가면서도 유물들을 꼭 안고 있어 그녀의 진한 피가 유물에 스며들었다. 1948년 4월 1일 한필려사모는 42세에 순교하였다.
1948년 4월 20일 김양선목사는 기독교반물관장으로서 남산에서 기독교박물관을 개원하였다. 출품된 자료 중 어떤 것엔 심한 얼룩이. 어떤 것엔 한필려사모의 핏물이 배어 있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숭실대학교
남편 김양선목사
한필려는 1906년 평양 선교리에서 고무신공장을 경영하는 한상호씨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신유치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때 한필려는 김양선을 만나 결혼했다. 김양선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어려운 신학생을 만나 생활을 꾸려나가려니 핍절했다.
거기에다 김양선은 사학자로서 기독교사료만 보면 돈을 꾸어서라도 사서 수집했다.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슈셩교젼셔', 최초의 찬송가인 ‘찬양가’, ‘찬성시’, 최초의 교회신문인 그리스도인 신문 등이 김양선이 신학교시절 수집한 것이었다. 김양선은 기독교사료 뿐만 아닌 일반 희귀사료도 수집했다. 병인양요 때 대원군이 어용희장군에게 보낸 전쟁지휘서 100통, 홍경래난 때 정부 쪽 기록인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같은 것이 그것이다. 김양선은 선교사들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구문사료까지 어렵게 수집했다.
1943년 목사가 된 김양선은 섬기던 정주중앙교회에서 신사참배문제로 쫓겨났다. 김목사는 정주중앙교회 당회장자리에서만 축출된 것이 아니다. 목사의 생명인 강도권(講道權)도 박탈당했고 금족령까지 받았다. 일제가 김양선에 대하여 이렇듯 가혹했던 것은 전문학교 시절부터 ‘청주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한 경력 때문이었다. 김목사는 그로 인해 옥고까지 치렀다.
김목사가 평북 구성에 있는 신시까지 들어가 해방 때까지 은둔생활을 한 것은 한필려사모의 조언 때문이었다. 한사모는 신시에 움막을 짓고 농사도 하고 외양간도 만들어 가축도 길렀다. 신시는 얼마나 산골짜기였던지 맹수가 출몰해 양들을 약탈해가 한사모는 밤잠도 자지 못하고 양떼를 지킬 때가 많았다.
한사모는 김목사가 생명만큼이나 귀중히 여기는 사료들을 소중히 보관했다. 3.1운동 때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사진 30매는 베개 속에 넣었고 안중근의사의 옥중 육필과 태극기는 이불 속에 감추었다. 폐교당한 숭실학교의 대리석간판은 다리미판 같이 만들어 보관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김목사가 수집한 대개의 기독교사료들이 북한에 있었다. 한사모가 자원하여 3.8선을 넘어가 귀중한 문헌들을 운반해왔다. 두 번째도 월북해 자료를 가지고 무사히 넘어왔다. 그러나 1947년 들어서는 3.8선 경비가 강화되어 있었고 한사모가 자료들을 머리에 이고 해주앞바다에서 막 배에 발을 들어 밀었을 때 인민군경비병이 나타나 따발총을 갈겨댔다. 한사모는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의료시설 하나 없었던 배안에서 숨을 거뒀다. 한사모는 죽어가면서도 유물들을 꼭 안고 있어 그녀의 진한 피가 유물에 스며들었다. 1948년 4월 1일 한필려사모는 42세에 순교하였다.
1948년 4월 20일 김양선목사는 기독교반물관장으로서 남산에서 기독교박물관을 개원하였다. 출품된 자료 중 어떤 것엔 심한 얼룩이. 어떤 것엔 한필려사모의 핏물이 배어 있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숭실대학교
남편 김양선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