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8선 노곡리교회의 담임목사 ” 생년월일 : 1902년 3월 16일 출생지 : 평북 박천군 청용면 만수동 순교일 : 1949년 8월 18일 순교지 : 38선 이북 직분 : 목사 교단 : 기감 |
방승학은 1902년 3월 16일 평안북도 박천군 청용면 만수동에서 부친 방웅식(1883년 1월 20일생)과 모친 강우달(1876년 7월 17일생)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방승학은 조보진(1905년 6월 18일생)사모와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나 그 자식들이 이유 없이 계속 죽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보라고 권유해서 예수를 믿고 얻은 자식이 장남 방윤일이며 그 후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온양방 가문으로부터 예수를 믿는다고 내쫓임을 당해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927년 영평구역에서 목회를 시작으로 1937년 동부연회 경동지방 포천기도처에서 2년 시무하였다. 1939년 제7회 동부연회에서 협동회원으로 허입하며 1939년 동부연회 경동지방 영평의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로 사역하고 1941년 동부연회 경성구역 협동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제 9회 동부연회에서 목사안수 받고 동암교회에 제17대 담임자로 부임하여 1945년 3월까지 시무하였다.
1945년 3월 포천군 이동면 노곡리 노곡리교회로 부임한 방목사는 협동회원시절에도 포천의 영평구역 혹은 포천구역에서 담임목회 또는 순회목회를 하면서 포천 전 지역 교회들의 소식을 감리회보에 보냄으로 포천지역 교회들의 역사를 더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노곡리교회는 38경계인 38이북에 위치했기에 소련군이 진부하여 숙소로 사용했고 신축한 목사관도 소련장교들의 숙소로 빼앗기게 되었다. 후엔 소련군과 임무를 교대한 북한 정권의 경비대가 교회에 다시 주둔하여 노곡리교회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웠다. 이런 노곡리교회를 담임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시련의 길이었다.
38이북에 있던 노곡리는 당시 철원군에 속해 있었다. 공산정권을 세운 공산당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검거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도 체포하였다. 이때 조만식선생이 창당한 조선 민주당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던 개무지(노곡리교회가 있던 곳)사람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다.
1948년 8월 추석 다음날, 순교를 각오한 채 월남하지 않았던 방승학목사는 공산당에게 체포, 납치되어 1949년 8월 18일 48세에 순교하였다.
방승학은 1902년 3월 16일 평안북도 박천군 청용면 만수동에서 부친 방웅식(1883년 1월 20일생)과 모친 강우달(1876년 7월 17일생)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방승학은 조보진(1905년 6월 18일생)사모와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나 그 자식들이 이유 없이 계속 죽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보라고 권유해서 예수를 믿고 얻은 자식이 장남 방윤일이며 그 후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온양방 가문으로부터 예수를 믿는다고 내쫓임을 당해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927년 영평구역에서 목회를 시작으로 1937년 동부연회 경동지방 포천기도처에서 2년 시무하였다. 1939년 제7회 동부연회에서 협동회원으로 허입하며 1939년 동부연회 경동지방 영평의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로 사역하고 1941년 동부연회 경성구역 협동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제 9회 동부연회에서 목사안수 받고 동암교회에 제17대 담임자로 부임하여 1945년 3월까지 시무하였다.
1945년 3월 포천군 이동면 노곡리 노곡리교회로 부임한 방목사는 협동회원시절에도 포천의 영평구역 혹은 포천구역에서 담임목회 또는 순회목회를 하면서 포천 전 지역 교회들의 소식을 감리회보에 보냄으로 포천지역 교회들의 역사를 더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노곡리교회는 38경계인 38이북에 위치했기에 소련군이 진부하여 숙소로 사용했고 신축한 목사관도 소련장교들의 숙소로 빼앗기게 되었다. 후엔 소련군과 임무를 교대한 북한 정권의 경비대가 교회에 다시 주둔하여 노곡리교회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웠다. 이런 노곡리교회를 담임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시련의 길이었다.
38이북에 있던 노곡리는 당시 철원군에 속해 있었다. 공산정권을 세운 공산당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검거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도 체포하였다. 이때 조만식선생이 창당한 조선 민주당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던 개무지(노곡리교회가 있던 곳)사람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다.
1948년 8월 추석 다음날, 순교를 각오한 채 월남하지 않았던 방승학목사는 공산당에게 체포, 납치되어 1949년 8월 18일 48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