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태 복 ( 金 泰 福 , 1903 ~ 1949 )


“ 아는 만큼 행동으로 증명한 신앙지식인 ”
생년월일 : 1903년
출생지 : 평양 장천동
순교일 : 1949년 12월 19일
순교지 :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김태복 목사는 1903년 평양 장천동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하지 않았으나 기독교 가정에서 순탄하게 성장한 그는 숭실중,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부터 전북 삼례국민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곳에서 신앙 깊은 정학찬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1926년 교사직을 떠나 신태인교회, 부안 관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말씀을 증거할때마다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 있던 그는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오베 중앙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하던 1935년 귀국하여 남원 운봉교회에시 강도사 시절을 보내고 이듬해 목사안수 후 전주 중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목회하면서 전주 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한 그는 신사참배결의가 있던 193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마도 조선교회 전체를 흔드는 신사참배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드러내고자 하였을지 모른다. 오사카 제13교회를 시무하면서 연구를 거듭한 그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말할 수 없는 핍박 중에 '신도요의'를 저작하여 신도의 우상주의를 폭로하였다.

1944년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서 신약학과 헬라어교수로 강의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으로 기삐하던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종교를 말살하는 공산주의었다. 동양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의 저항은 완강했으나 그럴수록 공산당은 무차별적으로 핍박하였다. 목회자 양성의 요람인 평양신학교를 지키려는 교장 김인준과 교수들의 피나는 노력에 공산당은 체포와 구금, 고문, 그리고 교회당페쇄로 박해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태복목사는 기독교도연맹가입을 결연히 반대하다가 1949년12월19일 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되어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