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소개


김 태 주 ( 金 泰 周 , 1888 ~ 1950 )


“민족을 교회같이 사랑한 순교자”
생년월일 : 1888년 12월 8일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군
순교일 : 1950년
순교지 :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김태주 목사는 1888년 음력 12월 8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 39번지에서 김해 김씨 김준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곱살부터 의주군 위원면 정심동에 있는 삼성제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했고,17세가 되던 1905년에 의주 서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김태주는 이후 의주 구시 학교를 위시해 양실학교 부속 측량과를 졸업했고 1909년에는 1년제 중학과정을 졸업한 후 교사가 되어 양실학원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11년에는 양실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또 그해에 의주 서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18년 양실학교 교장직을 그만두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가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낸 날 그는 그 비장한 심정을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을 하기에는 적어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훌륭한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데 있다. 예수님도 과실을 많이 맺는 자가 참 제자가 된다(요15:8)고 하셨기 때문이다. 둘째는 훌륭한 애국자가 되기 위함이다. 조선 민족만큼 불쌍한 민족도 없다. 왜놈들에게 나라를 잃고 유리 걸식하기 몇 년이냐? 그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므로 내 민족의 영혼만은 불쌍하게 만들지 않아야 되겠기 때문이다. 셋째는 내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기 위함이다. 세상에는 많은 명예직이 있다. 관리도 명예스럽다. 영의정,좌•우의정,그리고 판서, 지방관 등 모두 족보에 오르는 명예직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직업보다 목사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만인을 하늘나라 백성을 삼게하는 성직이다. 이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여,내 생명을 당신에게 바치오니 이 몸을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멘" 그 날 일기장은 얼룩얼룩 물이 번져 있었다. 눈물을 홀린 자욱이었다.

김태주가 평양신학교 2학년에 재학할 때였다. 삼일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주의자 김태주는 방관하지 않고 앞서 뛰었다. 그는 고향땅 의주로 달려가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그의 열열한 후원으로 그의 제자들도 힘을 얻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김태주는 독립만세 사건이 있은 그해 9월 10일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연통제의 의주 북구 교통국장에 임명되었다. 교통국장이란 군자금을 모금하고 통신,인물소개같은 조직망 기능 확대를 하는 위치였다. 일제하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내걸고 해야하는 직책이었다. 1920년 4월,김태주는 용만독립청년단을 조직했다. 독립운동 단체였다. 용만청년단은 국내에서 군자금모금 등을 모집하는 한편 민족반역자 처단같은 테러행위도 감행했다. 그러나 이듬해 11월 평북 의주 경찰서에 검거되므로 용만독립청년단도 그 활동을 정지당했다. 김태주는 1년의 징역살이를 끝내고 출옥해서는 만주 봉천으로 건너가 서탑교회,신도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 의주로 돌아와 창원교회 전도사로 시무했다. 김태주는 창원교회에 시무하며 평앙신학교에 복학해 1928년 입학한지 10년 만에 졸업하고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되고도 선천신성중학교 이사로 있으면서 상해 임시정부와 유대를 갖고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35년 의주군 고관면 토교동에 있는 토교동교회 목사로 취임한 후 그 곳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그해 가을 월남했다. 김태주 목사가 왜 그토록 떠날 줄 모르고 사랑한 고향을 쉽게 버리고 월남한 것인가? 그것은 공산주의의 모순을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된지 2주일 후 밀어닥친 공산군들을 보며 그는 경악했다. 더욱이 김일성을 자처한 김성주가 이끄는 팔로 군이 북한 땅을 점령하자 더 더욱 그러했다. 그는 팔로군의 속성을 만주에 있는 동안 뼈 아프게 경험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굶주리는 동포들의 것도 염치 없이 뺏어 먹었고, 죽이기까지 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에겐 민족도 없었다. 그런 팔로군 이 북한을 점령했을 때 그는 북한에 더 있을 의욕을 잃었다. 그는 그해 가올을 기해 3.8선을 넘어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자리를 잡고 성북교회를 개척했다.

1950년 625 동란이 터졌다. 이웃들은 김 목사에게 피난을 권했다. “북에서 나온 분들은 못삽니다. 피난가셔야 합니다” 가족들의 열화같은 성화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목사가 어떻게 양들을 버리고 또 다시 도망을 치겠느냐,내 나이 환갑을 지났는데 이제 더 이상 가지 않으련다. 이곳이 내가 살고 죽을 느보산 골짜기이다” 그는 인민군들이 서울을 장악해서도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햇볕이 작열했던 8월 초 인민군에게 연행당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 9월 18일 맥아더의 연합사 군대가 서울을 탈환하자 북으로 쫓겨가는 인민군들은 우익 인사들을 죽이거나 납치해 끌고 갔다. 김목사는 그런 난세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총살당해 순교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