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소개


배 덕 영 ( 裵 德 榮 , 1901 ~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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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적 교육중심의 주일학교운동 선구자 ”
생년월일 : 1901년 12월
출생지 : 경기도 파주 조리면 죽원리
순교일 : 1950년 10월
순교지 : 평양남도 평양형무소 뜰
직분 : 목사
교단 : 감리교


배덕영은 1901년 12월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죽원리에서 목사 배선범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던 배덕영은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27년에는 협성신학교를 진학했다. 재학 중에는 교량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총리원간사 및 주일학교 전국연합회간사로 겸직했다.

배목사는 더 공부해야겠다는 일념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깨릿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배목사가 종교교육을 전공한 이유는 커가는 소년들을 예수정신으로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배목사는 일꾼이 없는 조선에 다시 들어와 주일학교운동을 할 때에 벌써 구연동화 시청각교육을 이용하는 등 주입식 교육풍토에 경험적 교육을 역설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배목사는 전국을 돌아치며 교사강습회를 인도했다. 교사들을 통해 조선교회에 주일학교 교육을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배목사가 주일학교운동에 집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제가 신사참배의 덫을 놓고 조선교회를 극도로 탄압할 때 1941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는 그를 교장으로 초빙하였고 배목사는 기꺼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고등성경학교라면 농촌교회 여교역자양성소였고 그들을 통해 교육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배목사는 해방될 때까지 5년간 교장으로 일하면서 장로교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와 구별을 하기 위하여 성화여자성경학교로 개명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남과 북이 갈라져 남북교회의 교류가 끊어지자 서울성화신학교만 믿고 신학교육을 중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에 거주하던 박대선목사, 송정근목사와 3인은 머리를 맞대고 숙의한 후 평양에 성화신학교를 세워 배목사가 교장직을 맡았다. 시련이 많으면 은혜도 많다고 학생들은 구름떼처럼 몰려와 한 학년 200명씩 강의실이 빽빽이 찼다.

1949년 12월 16일 성화신학교는 600명의 학생들이 채플에 모여 2학기 종강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배덕영교장이 사도행전 20:25절을 봉독할 때 교수와 학생들은 깜짝 놀랐고 모두 울었다. 공산당의 신학교탄압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배교장이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교장의 예견대로 그해 성탄절에 남산현감리교회에서 성탄설교를 마치고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돼 끌려갔다.

강양욱으로부터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배목사는 기독교도연맹의 사이비성을 보고도 그 손을 들어줄 수 없었다. 결국 1949년 12월 25일 그는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폐교를 강요받았지만 거절하고 숱하게 고문을 당하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돼 고문을 얼마나 당했던지 언어능력까지 상실했다. 이듬해 1950년 6.25사변이 터지고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는 날 배덕영목사는 평양형무소 뜰에서 공산군의 총탄에 쓰러져 50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