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보다 먼저 순교의 열매를 드린 아들” 생년월일 : 1930년 9월 18일 출생지 : 경상남도 함안 순교일 : 1948년 10월 21일 순교지 : 전라남도 순천시 직분 : 학생 교단 : 장로교 |
손동신은 1930년 9월 18일 부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孫良源)목사, 모친 정양순으로부터 출생했다.
1945년 해방 후 한국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낮에는 국방군이 다스리고 밤에는 공산단원들이 게릴라로 식량을 약탈하는 등 공포분위기였다. 손동인과 동생 손동신은 손양원목사가 신사참배 반대세력에 서서 감옥살이를 오래하는 탓에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두 형제가 학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8.15해방과 더불어 아버지 손양원목사가 풀려나고 부터였다.
형 손동인은 순천사범학교 4년으로 편입학했고 동생 손동신은 순천중학교 2년으로 편입했다. 형 손동인은 기독학생회장이었을 뿐 아니라 좌익계열 학생들의 활동에 반대를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선교사들과의 친분 있는 교류로 사범학교 졸업 후 미국유학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 주변의 학생들이 형 손동인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였지만 좌익들은 미제의 앞잡이라고 온갖 박해를 가했다.
1948년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우리 국군 장교의 주도하에 여수순천반란사건이 터졌다. 제주도에 거주하던 좌익분자들은 조직적으로 5월 10일 대한 민국총선 반대운동을 폈다. 정부는 14연대를 여수에 파견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그런데 군대 안에 적색분자 장교 김지회가 공산주의 서클을 만들어 1948년 10월 20일 새벽 2시 무기고를 탈환하여 시가지를 점령했다.
순천에는 선교사들이 미션스쿨을 설립해서 선교하였다. 공산주의 이념으로 학습 받은 젊고 똑똑한 이들이 교사로 고등학교에 파송 받아 고등학교 안에서 무섭게 좌우익으로 팽팽하게 양분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장교들은 무고한 지도자들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는데 일조를 했다. 경찰이라고 죽이고 국민회의 대의원이라고 죽이고 목사라고 죽이고 예수 믿는다고 죽였다.
여수순천반란사건이 터지자 머리에 붉은 띠를 띤 좌익 학생들이 쇠몽둥이를 들고 맨 먼저 형 손동인의 하숙집으로 몰려왔다. 당시 순천중학교를 다니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 손동신은 형 손동인이 붙잡힌 것을 알고 형 손동인을 죽이려고 하는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폭도들에게 형 손동인은 집안의 장자이므로 자기를 대신 죽이고 형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형 손동인은 “너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집에 가서 자기를 대신해서 부모님을 잘 모시고 살라.”고 하였다. 동생 손동신은 형 손동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 광경을 보던 폭도들이 둘 다 죽이자고 하면서 만약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였지만 형제가 똑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폭도들의 총에 맞아 1948년 10월 21일 손동인은 순천사범학교 4학년, 손동신은 순천중학교 2학년 때에 함께 순교하였다.

동생 손동신과 기독학생들

형 손동인
손동신은 1930년 9월 18일 부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孫良源)목사, 모친 정양순으로부터 출생했다.
1945년 해방 후 한국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낮에는 국방군이 다스리고 밤에는 공산단원들이 게릴라로 식량을 약탈하는 등 공포분위기였다. 손동인과 동생 손동신은 손양원목사가 신사참배 반대세력에 서서 감옥살이를 오래하는 탓에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두 형제가 학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8.15해방과 더불어 아버지 손양원목사가 풀려나고 부터였다.
형 손동인은 순천사범학교 4년으로 편입학했고 동생 손동신은 순천중학교 2년으로 편입했다. 형 손동인은 기독학생회장이었을 뿐 아니라 좌익계열 학생들의 활동에 반대를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선교사들과의 친분 있는 교류로 사범학교 졸업 후 미국유학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 주변의 학생들이 형 손동인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하였지만 좌익들은 미제의 앞잡이라고 온갖 박해를 가했다.
1948년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우리 국군 장교의 주도하에 여수순천반란사건이 터졌다. 제주도에 거주하던 좌익분자들은 조직적으로 5월 10일 대한 민국총선 반대운동을 폈다. 정부는 14연대를 여수에 파견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그런데 군대 안에 적색분자 장교 김지회가 공산주의 서클을 만들어 1948년 10월 20일 새벽 2시 무기고를 탈환하여 시가지를 점령했다.
순천에는 선교사들이 미션스쿨을 설립해서 선교하였다. 공산주의 이념으로 학습 받은 젊고 똑똑한 이들이 교사로 고등학교에 파송 받아 고등학교 안에서 무섭게 좌우익으로 팽팽하게 양분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장교들은 무고한 지도자들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는데 일조를 했다. 경찰이라고 죽이고 국민회의 대의원이라고 죽이고 목사라고 죽이고 예수 믿는다고 죽였다.
여수순천반란사건이 터지자 머리에 붉은 띠를 띤 좌익 학생들이 쇠몽둥이를 들고 맨 먼저 형 손동인의 하숙집으로 몰려왔다. 당시 순천중학교를 다니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 손동신은 형 손동인이 붙잡힌 것을 알고 형 손동인을 죽이려고 하는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폭도들에게 형 손동인은 집안의 장자이므로 자기를 대신 죽이고 형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형 손동인은 “너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집에 가서 자기를 대신해서 부모님을 잘 모시고 살라.”고 하였다. 동생 손동신은 형 손동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 광경을 보던 폭도들이 둘 다 죽이자고 하면서 만약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였지만 형제가 똑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폭도들의 총에 맞아 1948년 10월 21일 손동인은 순천사범학교 4학년, 손동신은 순천중학교 2학년 때에 함께 순교하였다.
동생 손동신과 기독학생들
형 손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