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한 순교자” 생년월일 : 1882년 출생지 : 평안북도 철산 순교일 : 1948년 순교지 : 평북 용천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
1. 출생, 입교, 조사로 시무
김상현 목사의 생애 구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그의 유년 시절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김상현 목사는 1882년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용산동 248번지에서 태어났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따르면 김상현은 19세가 되던 해인 1901년,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원두우, 元杜尤)와 전도인 신화순(申和淳), 이춘경(李春景) 등의 전도로 김광현(金光鉉), 김춘기(金春基) 등과 함께 복음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조금 벗어나 평북 용천군에서 선교사와 지역교회를 돕는 용암교회 조사(助事, helper)로 시무하며 전도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상현은 입신 후 줄곧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청년기를 보내고 있음은 그가 조사로 활동하며 복음 전도를 위해 더 직접적이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조사는 선교사를 도와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사역을 행하는 교인으로, 선교사로부터 임명된다. 선교사는 신앙의 발전과 그 깊이를 가늠하고 전도에 헌신할 수 있는 성실하고 진실한 신자를 조사로 임명하여 함께 전도사역을 했다. 때로 조사는 선교사가 갈 수 없는 지역으로까지 한인신앙공동체 혹은 교회를 돌보며 선교사 이상의 사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로보건데, 김상현이 1905년 조사로 시무했다는 기록은 그의 신앙생활과 전도활동이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도와 선교사역에 가담하여 지역 전도와 교회 설립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조사로서의 사역은 그가 1925년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3학년 재학생 명단에 “助事”(조사)로 기록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무려 20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이는데, 김상현이 선교사와 함께 또는 단독으로 선교사역과 지역전도를 감당해 온 초기 한인교회 지도자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2. 장로 장립, 목사 안수
김상현은 용천군 용암교회 조사로 시무하던 중 평안북도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 선천(宣川)으로 이주하여 신앙과 인생에 대해 스스로 발전을 기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선천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으나 용천에서는 전투가 발생했기 때문에 김상현은 용천에서 조사로 계속 시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상현은 교인수가 주민수의 20%정도가 되는, 기독교 도시로 여길 수 있는 선천으로 이동해서 신앙훈련과 전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선천으로 이동하여 신성학교에 입학한 것은 이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신성학교(信聖學校)는 선천의 첫 교인이자 1907년 장로교 독노회 설립 당시 장로교 첫 7인 목사 중 한명인 양전백을 위시하여 선천읍교회 교인들이 1906년 9월에 설립한 기독교계 남자 중등학교로서, 약 30여명의 첫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4년제 교육과정으로 운영된 신성학교는 개교 후 3년간 약 7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고, 1909년 6월 제1회 졸업생 9명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1명이 김상현이었다. 당시 졸업 동기생 중 방효원(방지일 목사의 부친), 원성덕 등이 있었다. 신성학교에서 김상현은 일반 과목 뿐 아니라 성경 등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근대 교육과 신앙의 체계를 익혔다. 또한 이곳에서 민족혼을 깨우치며 일제에 의한 한반도 침탈을 목격하고 민족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한다.
신성학교를 졸업 한 후 김상현은 동기생 방효원, 원성덕과 함께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김상현은 평북 정주군 관주면으로 이주하여, 관산 장요교회 전도사로 시무했다. 김상현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925년 12월 22일 제19회로 주기철 등과 함께 졸업하게 된다. 김상현은 43세였고, 함께 졸업했던 주기철은 29세였다. 그리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후 용천군 용암포제일교회, 철산군 백량면 영동교회, 초산읍교회, 위원읍교회, 선천 갑암교회, 보신교회, 고부교회, 은봉교회, 용천 대성교회, 철산 회당교회 등에서 목회하며 평북일대 교회부흥에 헌신했다. 또한 그는 교회를 통한 구령운동 뿐 아니라 청년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일제의 억압으로 생명과 인권이 유린당하는 민중의 아픔에 동참하여 이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1929년 철산 영동교회에서 목회할 때는 “청소년의 교육을 통한 자주 독립의 역량 축적을 위해서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도 정성을 쏟아” 민족혼의 일깨움과 자유독립의 꿈과 의지를 키웠다.
3. 독립운동에로의 투신
1919년 3월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37세의 김상현은 조사로 시무중인 교회를 중심으로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 소재 사립 영창학교 강훈채(姜勳採) 교장 그리고 광호리교회 청년회 임원들과 함께 뜻을 모아 정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정신과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김상현은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을 꾀함은 당연한 행위”이므로 “다수와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침은 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이 독립하면 일본, 중국, 조선이 화합하여 백인종에게 양보할 일이 없게 될 것”을 외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맥을 같이하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그는 1919년 7월 7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으로 형 판결을 받고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9월 4일 기각 판결 받아 2년 여간 복역했다. 이후 그는 만주일대에서 끊임없는 독입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김상현의 신앙은 ‘지금여기’와는 별개로,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관료의 부패와 부정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조정의 운명이 기울었으며, 나아가 일제의 한반도 식민화로 백성들이 더 고난을 당하고 있던 때, 곧 나라가 망하는 총체적 위기와 고난 속에서 초기 조선인 신자 상당수는 신앙을 바탕으로 애국계몽 운동을 하면서 독립된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고 신앙고백으로 그들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비록 3.1만세 운동이 나이, 성별, 종교를 뛰어넘는 범민족적 전국적 독립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박정신이 지적하듯이,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가 “지도력, 운동가들, 그리고 조직”을 제공했기 때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승태 역시 만세운동이 빠르고 일관되게 전국적 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인원을 동원하고 운동을 조직하고 소통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개신교인이며, 만세운동 첫날 7,835명 중 개신교인수는 1719명으로 전체 22%를 차지한다. 개신교인들은 3.1운동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은 주요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3.1 독립만세운동은 1, 2대 총독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의 무단 정치 즉 헌병들의 무자비한 총칼과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태형의 무서움 아래 박해 받고 생명을 유린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참여하고 연대한 신앙운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의 혹독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바,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화와 타인의 생명존중을 지향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초기단계에서 기독교인 만세운동 참가자에게 배포된 것으로 보이는 <독립단 통고문>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만세운동이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행위였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우리의 존경스럽고 고귀한 독립 단원 여러분이여. 무슨 일이든지 일인(日人)들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이니 독립의 주의를 손해케 할 뿐인즉 다 바라건대 각자 주의할지며, 신도는 매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아가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으로 순환하여 독료할 것이니라.
김상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그는 평화와 평등, 그리고 생명이 존중받는 정의로운 나라를 신앙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실천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서정민은 일제의 잔혹한 보복과 교회의 피해를 두고 “교회가 3.1운동의 주도자였음을 증거하는 일인 동시에 민족의 다른 지체가 감당해야 할 희생마저 더하여 뒤집어 쓴 ‘크리스천다운’ 역할”, “3.1운동은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고통 받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진 아름다운 자취”로 평가한다.
4. 순교와 유족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므로 패전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깐,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한 강대국들은 남쪽은 미군정이, 북쪽은 소련군정이 통치하도록 하였다. 특히 북쪽의 김일성의 공산당이 소련군정에 힘입어 여러 민족지도자들을 제거하고 힘을 얻을 갈 때 많은 교인들과 지도자들은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김상현 목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 시무하던 용천군 내중면 대성교회 교인들을 떠나지 않고 북쪽에 남아 민족의 내일을 설계하며 평북일대의 교회 부흥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치하 북쪽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기독교지도자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 남았던 교회의 목회자들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개조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김상현 목사는 “공산당의 선동에 놀아나는, 노동자 농민 출신의 폭도들에게 난타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48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철산군 회당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했으나, 폭도들에 의해 부상이 끝내 치유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김상현 목사. 그는 참 목자로 교회와 교인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주어진 목회의 사명을 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대부분의 북쪽의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치하 교회를 놔두고 남쪽으로 피난 갔지만, 그는 고난을 감수하고서도 끝까지 남아있던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지켰다. 그는 또한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민족의 지도자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신앙, 사역, 민족애 등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서성이며,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후손된 우리는 서둘러 그의 신앙과 삶, 민족애를 밝혀 그로부터 하나님의 사랑, 평화, 정의를 배워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김상현 목사의 믿음을 기억하고 그의 신앙을 온 교회가 전수하며 따르기 위해 201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103회 총회는 고 김상현 목사를 총회순교자로 추서하여 교회에 공포했다.
무엇보다 김상현 목사의 순교영성은 자녀들에게 이어져 내려 왔다. 김상현 목사의 딸과 사위인 김성숙 권사와 김성섭 장로는 김상현 목사의 순교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가, 노회가, 총회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힘이 되는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1970년 중후반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긴급조치 하에서 총회 산하 교회가 민주운동 가담으로 총회가 운영이 갈수록 어렵게 되던 때, 김성섭 장로는 총회 운영비를 극비리에 도와 주님의 사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아낌없이 동참하셨다고 당시 총회 총무를 맡고 계셨던 김윤식 증경총회장은 2009년 10월 김성섭 장로를 추모하며 고백했다.
김상현 목사와 길태화 사모 부부의 대표 유족은 딸 고 김성숙 권사와 사위 고 김성섭 장로의 2남3녀, 김재웅, 김재형, 김순희, 김순영, 김순미 장로가 있다. 김순미 장로는 예장통합 104회 총회 여성 최초 부총회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을 엮임하고 현재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이사장과 총회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1. 출생, 입교, 조사로 시무
김상현 목사의 생애 구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그의 유년 시절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김상현 목사는 1882년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용산동 248번지에서 태어났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따르면 김상현은 19세가 되던 해인 1901년,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원두우, 元杜尤)와 전도인 신화순(申和淳), 이춘경(李春景) 등의 전도로 김광현(金光鉉), 김춘기(金春基) 등과 함께 복음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조금 벗어나 평북 용천군에서 선교사와 지역교회를 돕는 용암교회 조사(助事, helper)로 시무하며 전도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상현은 입신 후 줄곧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청년기를 보내고 있음은 그가 조사로 활동하며 복음 전도를 위해 더 직접적이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조사는 선교사를 도와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사역을 행하는 교인으로, 선교사로부터 임명된다. 선교사는 신앙의 발전과 그 깊이를 가늠하고 전도에 헌신할 수 있는 성실하고 진실한 신자를 조사로 임명하여 함께 전도사역을 했다. 때로 조사는 선교사가 갈 수 없는 지역으로까지 한인신앙공동체 혹은 교회를 돌보며 선교사 이상의 사역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로보건데, 김상현이 1905년 조사로 시무했다는 기록은 그의 신앙생활과 전도활동이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도와 선교사역에 가담하여 지역 전도와 교회 설립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조사로서의 사역은 그가 1925년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3학년 재학생 명단에 “助事”(조사)로 기록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무려 20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이는데, 김상현이 선교사와 함께 또는 단독으로 선교사역과 지역전도를 감당해 온 초기 한인교회 지도자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2. 장로 장립, 목사 안수
김상현은 용천군 용암교회 조사로 시무하던 중 평안북도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 선천(宣川)으로 이주하여 신앙과 인생에 대해 스스로 발전을 기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선천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으나 용천에서는 전투가 발생했기 때문에 김상현은 용천에서 조사로 계속 시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상현은 교인수가 주민수의 20%정도가 되는, 기독교 도시로 여길 수 있는 선천으로 이동해서 신앙훈련과 전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선천으로 이동하여 신성학교에 입학한 것은 이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신성학교(信聖學校)는 선천의 첫 교인이자 1907년 장로교 독노회 설립 당시 장로교 첫 7인 목사 중 한명인 양전백을 위시하여 선천읍교회 교인들이 1906년 9월에 설립한 기독교계 남자 중등학교로서, 약 30여명의 첫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4년제 교육과정으로 운영된 신성학교는 개교 후 3년간 약 7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고, 1909년 6월 제1회 졸업생 9명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1명이 김상현이었다. 당시 졸업 동기생 중 방효원(방지일 목사의 부친), 원성덕 등이 있었다. 신성학교에서 김상현은 일반 과목 뿐 아니라 성경 등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근대 교육과 신앙의 체계를 익혔다. 또한 이곳에서 민족혼을 깨우치며 일제에 의한 한반도 침탈을 목격하고 민족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한다.
신성학교를 졸업 한 후 김상현은 동기생 방효원, 원성덕과 함께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김상현은 평북 정주군 관주면으로 이주하여, 관산 장요교회 전도사로 시무했다. 김상현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925년 12월 22일 제19회로 주기철 등과 함께 졸업하게 된다. 김상현은 43세였고, 함께 졸업했던 주기철은 29세였다. 그리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후 용천군 용암포제일교회, 철산군 백량면 영동교회, 초산읍교회, 위원읍교회, 선천 갑암교회, 보신교회, 고부교회, 은봉교회, 용천 대성교회, 철산 회당교회 등에서 목회하며 평북일대 교회부흥에 헌신했다. 또한 그는 교회를 통한 구령운동 뿐 아니라 청년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일제의 억압으로 생명과 인권이 유린당하는 민중의 아픔에 동참하여 이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1929년 철산 영동교회에서 목회할 때는 “청소년의 교육을 통한 자주 독립의 역량 축적을 위해서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도 정성을 쏟아” 민족혼의 일깨움과 자유독립의 꿈과 의지를 키웠다.
3. 독립운동에로의 투신
1919년 3월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37세의 김상현은 조사로 시무중인 교회를 중심으로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 소재 사립 영창학교 강훈채(姜勳採) 교장 그리고 광호리교회 청년회 임원들과 함께 뜻을 모아 정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정신과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김상현은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을 꾀함은 당연한 행위”이므로 “다수와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침은 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이 독립하면 일본, 중국, 조선이 화합하여 백인종에게 양보할 일이 없게 될 것”을 외쳐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맥을 같이하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그는 1919년 7월 7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으로 형 판결을 받고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9월 4일 기각 판결 받아 2년 여간 복역했다. 이후 그는 만주일대에서 끊임없는 독입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김상현의 신앙은 ‘지금여기’와는 별개로,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관료의 부패와 부정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조정의 운명이 기울었으며, 나아가 일제의 한반도 식민화로 백성들이 더 고난을 당하고 있던 때, 곧 나라가 망하는 총체적 위기와 고난 속에서 초기 조선인 신자 상당수는 신앙을 바탕으로 애국계몽 운동을 하면서 독립된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고 신앙고백으로 그들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비록 3.1만세 운동이 나이, 성별, 종교를 뛰어넘는 범민족적 전국적 독립운동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박정신이 지적하듯이,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가 “지도력, 운동가들, 그리고 조직”을 제공했기 때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승태 역시 만세운동이 빠르고 일관되게 전국적 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인원을 동원하고 운동을 조직하고 소통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개신교인이며, 만세운동 첫날 7,835명 중 개신교인수는 1719명으로 전체 22%를 차지한다. 개신교인들은 3.1운동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은 주요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3.1 독립만세운동은 1, 2대 총독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의 무단 정치 즉 헌병들의 무자비한 총칼과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태형의 무서움 아래 박해 받고 생명을 유린당하고 있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참여하고 연대한 신앙운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의 혹독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바,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화와 타인의 생명존중을 지향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초기단계에서 기독교인 만세운동 참가자에게 배포된 것으로 보이는 <독립단 통고문>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만세운동이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행위였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우리의 존경스럽고 고귀한 독립 단원 여러분이여. 무슨 일이든지 일인(日人)들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이니 독립의 주의를 손해케 할 뿐인즉 다 바라건대 각자 주의할지며, 신도는 매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아가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으로 순환하여 독료할 것이니라.
김상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그는 평화와 평등, 그리고 생명이 존중받는 정의로운 나라를 신앙의 힘으로 이루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실천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서정민은 일제의 잔혹한 보복과 교회의 피해를 두고 “교회가 3.1운동의 주도자였음을 증거하는 일인 동시에 민족의 다른 지체가 감당해야 할 희생마저 더하여 뒤집어 쓴 ‘크리스천다운’ 역할”, “3.1운동은 한국기독교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고통 받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진 아름다운 자취”로 평가한다.
4. 순교와 유족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므로 패전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깐,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한 강대국들은 남쪽은 미군정이, 북쪽은 소련군정이 통치하도록 하였다. 특히 북쪽의 김일성의 공산당이 소련군정에 힘입어 여러 민족지도자들을 제거하고 힘을 얻을 갈 때 많은 교인들과 지도자들은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김상현 목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 시무하던 용천군 내중면 대성교회 교인들을 떠나지 않고 북쪽에 남아 민족의 내일을 설계하며 평북일대의 교회 부흥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치하 북쪽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기독교지도자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 남았던 교회의 목회자들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개조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김상현 목사는 “공산당의 선동에 놀아나는, 노동자 농민 출신의 폭도들에게 난타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48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철산군 회당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했으나, 폭도들에 의해 부상이 끝내 치유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김상현 목사. 그는 참 목자로 교회와 교인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주어진 목회의 사명을 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대부분의 북쪽의 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치하 교회를 놔두고 남쪽으로 피난 갔지만, 그는 고난을 감수하고서도 끝까지 남아있던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지켰다. 그는 또한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민족의 지도자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신앙, 사역, 민족애 등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서성이며,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후손된 우리는 서둘러 그의 신앙과 삶, 민족애를 밝혀 그로부터 하나님의 사랑, 평화, 정의를 배워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김상현 목사의 믿음을 기억하고 그의 신앙을 온 교회가 전수하며 따르기 위해 201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103회 총회는 고 김상현 목사를 총회순교자로 추서하여 교회에 공포했다.
무엇보다 김상현 목사의 순교영성은 자녀들에게 이어져 내려 왔다. 김상현 목사의 딸과 사위인 김성숙 권사와 김성섭 장로는 김상현 목사의 순교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가, 노회가, 총회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힘이 되는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1970년 중후반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긴급조치 하에서 총회 산하 교회가 민주운동 가담으로 총회가 운영이 갈수록 어렵게 되던 때, 김성섭 장로는 총회 운영비를 극비리에 도와 주님의 사업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아낌없이 동참하셨다고 당시 총회 총무를 맡고 계셨던 김윤식 증경총회장은 2009년 10월 김성섭 장로를 추모하며 고백했다.
김상현 목사와 길태화 사모 부부의 대표 유족은 딸 고 김성숙 권사와 사위 고 김성섭 장로의 2남3녀, 김재웅, 김재형, 김순희, 김순영, 김순미 장로가 있다. 김순미 장로는 예장통합 104회 총회 여성 최초 부총회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을 엮임하고 현재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이사장과 총회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