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소개


강 문 구 ( 姜 文 求 , 1909 ~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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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가지 재능을 선교도구로 사용한 순교자”
생년월일 : 1909년 1월 20일
출생지 : 경북 영주군 이산면 신천리
순교일 : 1950년 3월
순교지 : 평양형무소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강문구는 1910년 1월 20일 경북 영주군 이산면 신천리에서 내매교회 강석초장로와 이중평권사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총명하고 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보통학교 가기 전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시절에 벌써 어린이 부흥사로 소문이 났다. 그는 주일학교 운동에 관심을 쏟아 구연동화는 물론 시청각 교재를 사용한 교육에도 일가견이 있어 방학이면 전국교회를 돌며 하기 강습회 지도자로 뛰기도 했다. 또한 한국교회에 도입한 성경구락부 운동에 매진하였으며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성경구락부로 공부기회를 주었으며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도 마다하고 목양에 뜻을 두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문서운동을 펼쳐 후에 '겨자씨'라는 신앙잡지를 발전시켜 '신앙세계'를 펴냈다.

그 후 평양신학교을 중퇴하고 일본 중앙신학교를 1941년에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평양 고정리교회에 부임한 후 1942년에는 선천남부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였다. 선천남부교회는 교인이 1천명이나 되었고 장의자도 1200석이나 되었다.

해방 후 강목사는 일제하에 문을 닫았던 교단 신학교를 재건하고 새로 조직된 신학교수의 한 사람이 되어 평신을 민족교회의 보루로 만들겠다고 동분서주하였다. 당시 교장 김인준목사는 신학교를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947년 소련군 사령부 특무대로 연행하여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는 바람에 이성휘박사가 교장을 이었고 강문구는 박경구목사 등 교수진에 합류하였다. 공산군이 평신을 접수하자 마포삼열기념관으로 학교를 옮겨 임시로 사용하며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강목사가 담임목사로 맡아 설교를 했다.

1950년 3월 이른 새벽에 일어난 강목사는 신학생들을 상대로 새벽설교를 했다. "사명자의 목소리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 시대를 선도해야 합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외칠 사명만 있는 것입니다."라는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강목사는 공산당에 체포되어 아내와 제자들에게 작별인사 한마디 못 한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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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구목사가 출석했던 내매교회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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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평양신학교 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