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태 석 ( 李 泰 錫 , 1901 ~ 1950 )

“교회당만큼은 불법자들에게 내줄 수 없었던 순교자”
생년월일 : 1901년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
순교일 : 1950년 월 25일
순교지 : 평안남도 평양
직분 : 목사
교단 : 하나님의 교회


일찍 개화된 평양에서 출생한 이태석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시절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서 공부하여 1932년에 졸업하였다. 재학시절 금산 성결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학업에도 열중하였다. 

졸업후 1933년 강경교회에 이어 1936년에 군산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36년 11월에 성결교회를 탈퇴하여「조선 하나님의 교회」에 창립에 동참하였다. 그것은 3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3회 성결교회 총회에서 처음으로 지방출신인 노장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됨을 선교사와 서울중심의 이사회가 이에 대응하여 전 총회임원들과 제휴하여 제 3차 총회를 불신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법적인 총회해산에 격분한 곽재근,정남수,오계식, 변남성 등이 성결교회를 탈퇴하여 평양 상수리교회에서 송태용의「하나님 교회」와 병합하는 형식으로「조선 하느님의 교회」로 교단이 출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 의문을 품고 성결교단을 떠나「하나님의 교회」의 창립회원으로 참가하였고 그곳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9년 변남성 목사에 이어 상수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때 하나님의 교회 총회를 위해 열심히 뛰던 변남성의 39세의 죽음은 교계의 큰 충격이었다. 상수리교회에서 열심히 일 하던중 해방을 맞은 그는 다시 1950년 평양 신양리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작은교단으로서 공산당과의 투쟁은 더욱 힘겨운 일이었다. 6,25전쟁 와중까지 버티어 오던 교회당을 폐쇄시키면서 예배금지를 명령하였다. 하나님의 교회당을 불법자들에게 내어줄수 없었던 그는 그들과 투쟁하다가 연행되어 평양교회에 있는 평촌리 야구장에서 총살당해 순교함으로 남은 생애를 죽음으로 증거하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이태석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