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석 모 ( 崔 錄 模 , 1890〜1950 )


“초기 한국성결교회에 토대에 헌신한 순교자”
생년월일 : 1890년
출생지 : 서울
순교일 : 1950년
순교지 : 
직분 : 목사
교단 : 성결교


서울의 퇴락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최석모 목사는 어려서 한문을 익히고 한성영어학원을 다니면서 신학문에 눈을 뜨게되었다. 그의 어학실력이 인정받아 구세군의 통역일을 보면서 동양선교회의 전도를 받았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그는 1912년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1915년 졸업하던 해 무교정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1917년 독립문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1920년 동양선교회 한국본부 서기로 취임한 그는 교단확장에 주력하였다. 1922년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회 고문,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이사로 1924년에 선임되는 등 눈부신 활동으로 교단을 위해 충성하였다. 

1929년 순회목사로 만주, 함경,강원, 경기, 충청, 전라도 등지를 순회하면서 교회를 격려하였다. 1939년 일제의 어려운 시절에 만주 목단강에 북부성결교회를 개척함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중단없는 모습을 보였다. 1941년 12월 성결교 교역자 일제 검속때 옥고를 치르던 중 해산을 맛보아야했던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해방과 함께 힘차게 재건되는 성결교단과 함께 그는 1928년부터 담임했던 아현교회를 재건하여 성도들과 함께 눈물과 감격으로 봉헌예배를 드렸다. 충무,미아,후암동과 압해도, 수원 등지의 여러 곳의 교회를 개척하여 성결교회 교세확장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었다. 1949년에 총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일생을 교단을 위해 정열을 쏟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피난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그는 언제나 처럼 교회를 지키며 사택에서 조용히 수요일저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때 찾아온 내무서원에 의해 연행되어갔다. 그때 서울대 강사였던 장남 희범도 함께 연행되어 부자가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최석모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