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 운 ( 金 大 雲 , 1927 ~ 1950 )


"혀와 귀가 잘리면서도 예수를 증거한 순교자”
생년월일 : 1927년
출생지 :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곤양리
순교일 : 1950년
순교지 : 
직분 : 전도사
교단 : 감리교


김대운 전도사는 1927년 4월 평양에서 50리 (20km) 떨어진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곤양리 (일면 고냉이)에서 농사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48년 평양성화신학교에 입학을 했고,그해 2학기 때인 10월 중순 담임 전도사로 파송되어 장진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틈만 나면 노방전도를 할 정도로 열정적인 신앙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1950년 6.25가 발발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신학교는 졸업학기를 앞당기어 졸업을 시켰다. 당시 김대운 전도사는 본과 2학년 학생이었는데 전쟁으로 조기 졸업을 하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 발발 이후로 평양 안에 있는 교회들이 핍박을 받게되자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되였고 장진교회도 당국의 지시로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폐문만은 않으려 발버둥 했으나 허사였다. 장진교회가 문을 닫기 전 1950년 9월 8일밤이었다. 그날은 마침 금요일이었고 청년회원이었던 윤기수는 김대운 전도사와 철야기도회에 돌입했다. 새벽 3시가 되었을 때였다. 김대운 전도사는 윤기수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같은 부탁을 했다.

“윤 선생. 나는 이 동란에 순교할 것입니다"

"저도 전도사님과 함께 순교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윤 선생은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공산세력을 벗어나 월남하게 되면 신학하시고 좋은 목사 되셔서 제가 다 못한 주님의 사명을 내 대신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김대운 전도사는 반동분자로 낙인되어 공산당에게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윤기수와 함께 월남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 지나면 다시 교회를 재건하고 섬기고자 월남하지 않은 채로 공산당을 피해다녔다. 그러다가 공산당 내무서원들에게 체포 당했다. 내무서로 끌려간 김 전도사는 먼저 회유를 받았다. "예수만 믿지 않는다고 하시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가 예수 때문에 죽어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인간애를 발휘하는 듯 했다. 그러나 김대운 전도사는 신앙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을 배반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피홀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을 믿어야 삽니다. 이것이 생명의 비밀입니다”

그때였다. 그런 김대운 전도사의 말이 듣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김대운 전도사에게 고문을 가해 회유하기 우해서인지 “저 새끼 혀를 잘라버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김대운 전도사를 고문하던 공산당들은 그에게 달려들어 혀를 느려서는 칼로 잘라 버렸다.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김 전도사는 말을 할 수 없자 그는 이내 손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손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들었다. 그러자 공산당들은 또 한번 명령했다. “우리 말 듣지 않는 저 귀도 잘라버려” 공산당들이 또다시 달려들어 귀까지 잘랐다. 그래도 김대운 전도사는 지지않고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 결국 공산당들은 김대운전도사가 어떤 핍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자 며칠 뒤 사살시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