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교의 각오로 자신의 평생을 드린 순교자” 생년월일 : 1888년 9월 14일 출생지 : 경상남도 거창 순교일 : 1951년 순교지 : 경상남도 거창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
주남선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경남 거창군 읍내면 동동 28번지에서 한학자 주회현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거창 군수의 비서관 일을 보기도하였다. 1908년 5월에 복음을 받았고, 1911년 9월에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하였다. 1912년 6월에 맹호은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1914년 서리 집사 임명을 받았다. 진주 경남 성경 학원에 입학하여 1919년 2월에 졸업하고, 1928년에는 거창읍 교회의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한편 그는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그는 거창의 3.1 독립운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국권 회복단, 독립군 서로군정서에서의 모금활동을 통하여 줄기차게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그의 독립운동의 바탕에는 일제의 교육동화정책, 종교탄압정책 뿐만 아니라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을 샅샅이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지키고 민족교육의 활성화만이 영광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젊어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나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후에는 소명을 발견하고 목사가 되고자 하였다. 머나먼 길 평양을 10년 동안 오고 가면서 신학을 공부하여 1930년 3월 평앙 신학교를 제 25회로 졸업하고 1930년 10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1931년 2월 22일에 거창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죽는날까지 거창을 떠나지 않은 그의 삶의 역정은 숭고한 신앙절개와 자기희생 정신의 구현이었다.
1931년 2월 22일,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로 임직을 맡았다. 삼국(거창, 합천, 함양) 시찰장에서 당회장을 겸하여 청지기 사명을 다하였다. 1935년 11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앞장서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펴 나갔다. 서부 경남의 각 교회를 순방하며 반대 운동을 시작하였다. 결국 1940년 7월 17일, 신사 참배 반대운동자로 구금되어, 다음 해 7월 11일, 평양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거목들이 모인 감방이 되었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이 생명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일제 앞에 항거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당시 어지러웠던 경남 노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사랑과 온유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보수 신학 정립을 위하여 1946년 9월 20일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엿다. 이후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박윤선, 박형용 박사 등을 세워 고려신학교를 육성시켰다. 1950년 4월에는 거창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신사참배로 그릇된 길을 간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 기도하는 중 1950년 6.25 사변을 당하여 거창교회를 사수하였다. 교인들 대부분이 피난을 갔으나 그는 폭격속에서도 기도하며 심방하며 교회를 지켰다. 남은 성도들을 돌보며 오직 순교 일념으로 교회를 사수하였다. 인민군들이 그를 잡아다 처형하려 하였으나 그가 지닌 신앙과 인품 앞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산군에게 붙들려 심한 구타를 당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1951년 3월 23일 6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갔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가 1977년 12월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으며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주남선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경남 거창군 읍내면 동동 28번지에서 한학자 주회현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거창 군수의 비서관 일을 보기도하였다. 1908년 5월에 복음을 받았고, 1911년 9월에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하였다. 1912년 6월에 맹호은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1914년 서리 집사 임명을 받았다. 진주 경남 성경 학원에 입학하여 1919년 2월에 졸업하고, 1928년에는 거창읍 교회의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한편 그는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그는 거창의 3.1 독립운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국권 회복단, 독립군 서로군정서에서의 모금활동을 통하여 줄기차게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그의 독립운동의 바탕에는 일제의 교육동화정책, 종교탄압정책 뿐만 아니라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을 샅샅이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지키고 민족교육의 활성화만이 영광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젊어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나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후에는 소명을 발견하고 목사가 되고자 하였다. 머나먼 길 평양을 10년 동안 오고 가면서 신학을 공부하여 1930년 3월 평앙 신학교를 제 25회로 졸업하고 1930년 10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1931년 2월 22일에 거창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죽는날까지 거창을 떠나지 않은 그의 삶의 역정은 숭고한 신앙절개와 자기희생 정신의 구현이었다.
1931년 2월 22일, 거창읍 교회 위임 목사로 임직을 맡았다. 삼국(거창, 합천, 함양) 시찰장에서 당회장을 겸하여 청지기 사명을 다하였다. 1935년 11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자 앞장서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펴 나갔다. 서부 경남의 각 교회를 순방하며 반대 운동을 시작하였다. 결국 1940년 7월 17일, 신사 참배 반대운동자로 구금되어, 다음 해 7월 11일, 평양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거목들이 모인 감방이 되었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이 생명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일제 앞에 항거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당시 어지러웠던 경남 노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사랑과 온유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보수 신학 정립을 위하여 1946년 9월 20일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엿다. 이후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박윤선, 박형용 박사 등을 세워 고려신학교를 육성시켰다. 1950년 4월에는 거창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신사참배로 그릇된 길을 간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 기도하는 중 1950년 6.25 사변을 당하여 거창교회를 사수하였다. 교인들 대부분이 피난을 갔으나 그는 폭격속에서도 기도하며 심방하며 교회를 지켰다. 남은 성도들을 돌보며 오직 순교 일념으로 교회를 사수하였다. 인민군들이 그를 잡아다 처형하려 하였으나 그가 지닌 신앙과 인품 앞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산군에게 붙들려 심한 구타를 당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1951년 3월 23일 6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갔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가 1977년 12월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으며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