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남 조 ( 1875 ~ 1950 )

“ 복음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 일꾼 ”
생년월일 : 1875년
출생지 : 경상북도 포항
순교일 : 1950년 
순교지 : 경상북도 포항
직분 : 목사
교단 : 침례교



1875년에 태어난 백남조 목사는 침례교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파송된 '말콤 펜윅'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목회를 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울진, 울릉도, 예천, 포항 지역에서 사역했으며 후에 북간도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그는 본래 인재 양성에 뜻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배운 한학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한문학원을 운영하여 나라의 인재를 키우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신학문이 들어오자 우리나라의 젊은 이들이 신학문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에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반일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축출되어 유학생활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다. 고향에 돌아온 백 목사는 학교를 열었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함께 공부하였다. 이곳에서 배운 학생들이 우리나라 건국 초기 지도자로 또는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자로 혼란한 나라를 바로 일으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편 그는 영일군에서 덕망 있는 선비요 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송라 면장을 3년간 역임했으며 영일 군청의 고위관리로도 일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면서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명예와 지위 또는 권세는 한낱 헛된 것으로 여기고 모두 내놓았다. 영일 군수로 여러 차례 추대될 수 있었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오로지 주님의 일꾼으로 소명받은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백남조 목사는 신앙적인 긍지와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백남조 목사는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만 충성을 다했다. “성경을 읽고 나면 곧 실천에 옮기라”고 권면하고 가르쳤는데 “주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받은 것”은 참으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후진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평소에 동료들로부터 "꼬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이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그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사람이요 진리에 관해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백 목사는 공과 사가 분명했고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으면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교단의 규칙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노력한 목사였다. 그래서 올바른 법집행을 통해 교단 행정이 바로 서고 질서가 올바로 잡히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1925년 원산에 있는 총부에서 서기(현 총무직)로 교단의 사무와 행정을 관할하였다. 1935년 백 목사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거부했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우상에 절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침례교인물사"는 백남조 목사를 "복음의 푯대를 바라고 달려갔다."라고 표현한다.  이 귀한 뜻을 혼자 품고 있을 수 없어 공문을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낸 것이 일제에게 발각되면서 원산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3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형무소로 송치되어 5개월간 감옥에서 생활했다. 그 후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1942년 6월 일본 관원에 의해 본 교단의 임원들이 모두 검거되었을 때 백남조 목사도 함께 투옥되었다. 1944년 8월 8일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1945년 이 땅에 광복이 찾아왔다. 백남조 목사는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있는 교회에서 5년 동안 목회를 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8월 11일(음력) 경상북도 포항 송라에 인민군이 주둔 했다는 사실을 안 미공군이 광천천에 피난한 주민을 인민군으로 착각하여 폭격하면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백남조 목사는 소천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