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병 선 ( 閔 丙 璇 , 1922 ~ 1950 )

“ 죽음 앞에서도 떳떳했던 전도사 ”
생년월일 : 1922년 2월 23일 
출생지 : 충북 청원군 강서면 용정리 55번지
순교일 : 1950년 7월 17일
순교지 : 서울 덕수초등학교
직분 : 전도사
교단 : 장로교


민병선은 1922년 2월 23일 충북 청원군 강서면 용정리 55번지 동리부호 아버지 민창식 어머니 노순암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8년 제 14회로 강서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시절에는 두뇌가 명석하여 성적이 우수, 늘 선두를 다투었다고 한다.

1939년 18세에 민병선은 성광원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결혼 후에는 한때 흥남 비료공장에서 약 4년 간 근무하였다. 함경도 지방에 이주해 사는 동안 일본의 황국식민화 정책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눈뜬 민병선은 1943년 후반에 일본군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북간도로 탈출, 거기서 젊은 독립운동가들과 몰래 만나 소시민적 독립운동 협조자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민병선은 그해 가을 그리던 고향땅으로 돌아왔다. 민병선의 집안은 부친이 작고한 후 모친이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한 기독교인으로서 두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늘 기도하며 온 가족이 신앙과 진실한 삶으로 참된 기독인이 되기를 권고하였다. 작은 아들은 이미 신자가 되어 있었고 큰 아들 민병선이 신앙을 갖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모친은 영생의 도리를 강조하고 늘 성경을 읽으라고 권했다.

그러던 중 1946년 박재봉목사가 청주에서 부흥집회에 민병선은 모친과 함께 참여하고 큰 은혜를 받아 변화되어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입교 후 이왕 예수를 믿을 바에는 적극적으로 열심히 믿겠다고 하면서 날마다 성경을 통독하고 기도하면서 빠른 속도로 적극적인 결단의 신앙을 가진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 집중했다.

1947년에는 충북노회가 운영하는 청주고등성경학교의 민전도사는 6.25동란 직전까지 재학 중 농사를 지으면서도 열심히 성경연구와 학교수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8년 2학년 때 용암교회전도사가 되어 복음선교전선에 뛰어들었다.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용암교회의 부흥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설립된 지 약2년 된 20평정도의 20명 출석하는 초가집 시골교회 목회자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봉사활동으로 후에 40명 정도 모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파죽지세의 남진행군이 빨라 도중에 추월당할 것이 뻔해 피난을 포기하였다. 용암리 모처에 숨어들었으나 7월 10일 조선의 통일사업을 구실로 의용군에 강제징용되어 북행길에 서울의 덕수초등학교에 수용되었다. 7월 17일경 내무서원인 장교는 민전도사에게 성분조사를 한다며 “너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용암교회 전도사입니다.”하고 떳떳하게 대답하자 그 장교는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미제스파이 노릇하는 악질 반동분자”라고 하였고 저녁이 되자 민병선전도사는 운동장 한 구석으로 끌려가 공개총살로 29세에 순교했다.

민전도사 용암교회 시무시의 사진(1948년)

민전도사의 사모 서광원과 장남 석기군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