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산당 소굴에 끌려가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가지고 가야지.” 생년월일 : 1912년 출생지 : 평안북도 벽동 순교일 : 1950년 6월 26일 순교지 : 평안남도 평양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
허천기 목사는 1912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하였다. 1942년 평양신학교를 제 35회로 졸업하고 평북 용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6년 봄 청빙을 받아 평양동부교회에 부임하였다. 허천기 목사가 부임하기 전 동부교회는 생기도 없고 교역자도 자주 바뀌는 조그만 교회였다. 그러나 허천기 목사가 부임한 후에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그 당시 교인들은 허천기 목사에 대하여 "열정적인 설교, 카리스마적인 통솔과 정확한 교회운영으로 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하였고 북한 전 지역에 소문난 교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평양동부교회는 늘어나는 교인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확장과 증축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북한 정권의 핍박은 심해졌다.
그 당시 평양동부교회에서 교육부 사역을 담당한 안성진 목사는 처음 허천기 목사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을 노년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다. 허천기 목사는 다음같이 말했다고 한다. "요즘 수많은 사람이 비밀로 38선을 넘고 있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야 완전히 하나님 손에 달린 것 아니겠소. 어찌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일각인들 더 하겠소. 그저 생명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유가 있는 그날까지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할 것뿐 아니겠소? 짧아도 한 세상이고 길어도 한 세상입니다. 우리 일이란 짧았다고 못 다하는 것도 아니고 길었다고 다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짧았기 때문에 그 남긴 일이 더욱 완벽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1949년 12월 18일 오후 동평양 내무서의 호출에 의거하여 자진 출두하였을 때 그는 안성진 전도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 전도사님, 갑자기 어디에서 날 부르고 있소. 내가 가면 남들도 그랬듯이 행방은 아무도 모를 것 같소. 그들의 수법은 뻔한 것 아니오. 그러나 날 찾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은게 좋을 줄 아오." 그리고는 선반 위에서 신구약 합부로 된 회중 성경을 옷에 넣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공산당 소굴에 끌려가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가지고 가야지.”
허천기 목사는 안성진 전도사를 향해 집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안전도사는 끝내 같이 가려고 하였다. 경찰서 가까이 이르렀을 때, 허목사는 장작을 사면서 안전도사를 향해 “겨울이 닥쳐 날씨가 계속 추우니 이 장작 주인과 함께 어서 집으로 가시오. 집으로 돌아가 장작을 집에 쌓도록 하시오.” 라고 하며 안성진 전도사를 배려하였다. 그 날은 조사를 받고 일단 귀가하였다. 그러나 12월 23일 저녁 허천기 목사는 교회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 기독교 탐구사(김광수, 기독교문사 발행)에 의하면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순교하였다고 한다.
허천기 목사는 1912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하였다. 1942년 평양신학교를 제 35회로 졸업하고 평북 용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6년 봄 청빙을 받아 평양동부교회에 부임하였다. 허천기 목사가 부임하기 전 동부교회는 생기도 없고 교역자도 자주 바뀌는 조그만 교회였다. 그러나 허천기 목사가 부임한 후에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그 당시 교인들은 허천기 목사에 대하여 "열정적인 설교, 카리스마적인 통솔과 정확한 교회운영으로 교회는 날이 갈수록 부흥하였고 북한 전 지역에 소문난 교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평양동부교회는 늘어나는 교인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확장과 증축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북한 정권의 핍박은 심해졌다.
그 당시 평양동부교회에서 교육부 사역을 담당한 안성진 목사는 처음 허천기 목사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을 노년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다. 허천기 목사는 다음같이 말했다고 한다. "요즘 수많은 사람이 비밀로 38선을 넘고 있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야 완전히 하나님 손에 달린 것 아니겠소. 어찌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일각인들 더 하겠소. 그저 생명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유가 있는 그날까지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할 것뿐 아니겠소? 짧아도 한 세상이고 길어도 한 세상입니다. 우리 일이란 짧았다고 못 다하는 것도 아니고 길었다고 다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차라리 짧았기 때문에 그 남긴 일이 더욱 완벽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1949년 12월 18일 오후 동평양 내무서의 호출에 의거하여 자진 출두하였을 때 그는 안성진 전도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 전도사님, 갑자기 어디에서 날 부르고 있소. 내가 가면 남들도 그랬듯이 행방은 아무도 모를 것 같소. 그들의 수법은 뻔한 것 아니오. 그러나 날 찾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은게 좋을 줄 아오." 그리고는 선반 위에서 신구약 합부로 된 회중 성경을 옷에 넣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공산당 소굴에 끌려가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가지고 가야지.”
허천기 목사는 안성진 전도사를 향해 집으로 가라고 하였으나 안전도사는 끝내 같이 가려고 하였다. 경찰서 가까이 이르렀을 때, 허목사는 장작을 사면서 안전도사를 향해 “겨울이 닥쳐 날씨가 계속 추우니 이 장작 주인과 함께 어서 집으로 가시오. 집으로 돌아가 장작을 집에 쌓도록 하시오.” 라고 하며 안성진 전도사를 배려하였다. 그 날은 조사를 받고 일단 귀가하였다. 그러나 12월 23일 저녁 허천기 목사는 교회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 기독교 탐구사(김광수, 기독교문사 발행)에 의하면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순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