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소개


현 병 찬 ( 玄 例 讚 , 1899 ~ 1950 )


“나는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몸, 오직 예수님뿐이오!”
생년월일 : 1899년 1월 3일
출생지 : 서울 하교동
순교일 : 1950년 10월 20일
순교지 : 
직분 : 목사
교단 : 감리교


현병찬은 1899년 서울 하교동에서 태어났다.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지켜보며 인현학교를 1913년에 졸업한 그는 어린나이였지만 울분으로 지냈다. 시국을 살필 때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뜻한 바 있어 1920년 봄 만주로 갔다. 얼마 후에 다시 교포들이 많이 사는 소련령 시베리아 니코리스크로 갔으며 여기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와 있는 교포들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한 그는 얼마 후 세례를 받았으며 1922년 4월부터는 교포들이 경영하는 숭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열심히 가르치는 한편 조국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4년 여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 민족이 참으로 살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뿐이라고 생각하고 전도인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1924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5월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192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4월 오화영 목사의 주례로 박갑길과 결혼하였다. 1930년 동부연회에 입회 후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31년 9월 원산지방 협곡구역, 1935년 9월 광희문교회, 1939년 진남포지방 온정구역 비석리교회, 1943년 진남포 중앙교회를 담임하였다.

해방 후에도 계속 진남포에 머물러 있으면서 목회하였다. 이 시기 소련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공산당은 적위대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주민들이 교회로 모여오자 감리교 지도층 목사들은 38도선 이북에서만이라도 일제 때 해산된 서부연회를 재건 조직하여 교회질서를 정상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1946년 해방 후 처음 열리는 31절 기념행사에서 교회와 공산당이 충돌하고 급기야 김일성 암살미수사건이 벌어지자 공산당의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1947년 5월 공산당은 서부연회 연회장 송정근 목사, 서기 이피득 목사를 체포했다. 이때 서부연회 개최를 위해 신석구 목사가 자진해서 체포되고 대신 송정근, 이피득 목사를 석방할 것을 서부연회 중진 목회자 모임에서 제안하자 현병찬 목사는 자신이 제일 적임자임을 내세웠다. 연해주 선교사 시절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배웠기 때문에 소련군과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산당은 그에게 중책을 맡기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 말씀으로 번화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한 그에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언제나 "나는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몸, 오직 예수님뿐이오! 당신네들도 예수를 믿으시오!” 오히려 공산당원에개 서슴없이 전도하였다. 그의 능숙한 언변과 헌신적인 목회활동으로 공산주의자였던 자들이 공산당을 탈당하고 월남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자신들의 요청은 거부하고 소련군의 만행을 직접 찾아가 사령관에게 항의하는 등 주민의 권익을 위하는 일이 공산당에게 가시로 보였다. 1949년 4월 19일 공산당은 진남포에서 소위 "국방군 환영 북조선 5도 연합회 진남포지회" 사건을 조작, 주변의 목회자와 교인들을 포함하여 48명을 검거하였으나 맹호단의 중요인물이자 진남포중앙교회의 장로인 홍만호 장로가 현병찬 목사와 이 모임의 관계를 차단시킴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러자 이호묵 집사가 여전히 정치보위부 요시찰 대상이며 곧 검거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면서 속히 월남할 것을 권하였다.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있던 현병찬 목사는 1950년 1월 3일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되었다. 정치보위부는 현병찬 목사에게 몇 마디 물어보더니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현병찬 목사는 행방불명 되었다. 1950년 10월 20일경 625당시 국군이 평양에 진주하자 괴뢰군들은 북한에 있는 우익인사와 애국자, 목회자들을 학살시키고 도망했는데 그때 현병찬 목사도 학살당한 것으로 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