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청년운동 버리고 예수께 전향한 삶 ” 생년월일 : 1907년 12월 8일 출생지 : 평남 개천군 중남면 인곡리 순교일 : 1950년 7월 4일 순교지 :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
현석진은 1907년 12월 8일 평안남도 개천군 중남면 인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성장하다가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유학하여 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업에 정진 중 일본에서의 학생운동이 문제가 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진보적인 사상과 학생운동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여러 번 옥고를 치렀다.
이때 함흥남부교회에 시무하는 김형숙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김목사에게 감화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후 함흥남부교회의 기독청년회 회장과 전도사로서 10여 년간 시무하였으며 사회적인 활동으로 함흥 YMCA총무로 여러 해 동안 봉사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살길은 오직 주님을 믿는 길 밖에 없다.’며 당시의 청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지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현석진은 북한 땅에서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김형숙목사와 의논하여 월남하고 김혁숙목사의 권유로 조선신학교에 입학, 목회자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신학교시절 천성이 너그럽고 온순하여 접하는 동료들로부터 호감을 얻었으며 언제나 남에게 부드럽고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성격이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광주군 대왕면(당시)에 있는 세곡교회와 둔전교회에 전도사로서 봉사 하였다. 1948년 10월 28일 현석진은 한국신학대학을 7회롤 졸업하였다. 동년 12월 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28일 당시 전도사로 봉사하던 둔전교회에 목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40대의 현목사는 둔전교회 구역인 반경 20여리 마을 모랫말, 새술말, 외골, 저푸리, 청계산, 사송, 금토리, 너더리, 탄리, 야탑 분당에 이르기까지 전도에 힘쓴 결과 60여 평의 교회당에는 언제나 교인들이 가득 찼다.
1949년 동료목사의 소개로 여자신학교에 다니는 김양순을 맞아 결혼하였다. 많은 교인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복음전파에 힘쓰고 있던 중 1950년 6.25가 터졌다. 많은 교인들이 이북에서 월남하였고 요시찰 인물로 지명된 현목사에게 “어서 피신하시라.”고 간청하였지만 “내가 어떻게 교회와 교인들만 남겨두고 피난 갈 수 있느냐”고 거절하였고 동료목사들도 찾아와 피난할 것을 간청하지만 거절하였다.
피난길에 나선 친구들이 찾아와 밤이 맞도록 나라와 교회를 걱정하며 친구들은 혹시 누구 찾아오면 위험하니 숨어 있으라고 교회당지하실에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사택에 들어갔다. 1950년 7월 1일 새벽3시에 지역 공산당원 3명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월남자로 사상이 불순하고,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또 국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현석진은 나와라.” 그 소리를 들은 현석진목사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나가 같은 교회 김태수장로와 함께 검속되어 대왕지서에서 1주일 있다 광주결찰서와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 후 44세에 순교하였다.

현석진은 1907년 12월 8일 평안남도 개천군 중남면 인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성장하다가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유학하여 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업에 정진 중 일본에서의 학생운동이 문제가 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진보적인 사상과 학생운동의 전력이 문제가 되어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여러 번 옥고를 치렀다.
이때 함흥남부교회에 시무하는 김형숙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김목사에게 감화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후 함흥남부교회의 기독청년회 회장과 전도사로서 10여 년간 시무하였으며 사회적인 활동으로 함흥 YMCA총무로 여러 해 동안 봉사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살길은 오직 주님을 믿는 길 밖에 없다.’며 당시의 청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지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현석진은 북한 땅에서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김형숙목사와 의논하여 월남하고 김혁숙목사의 권유로 조선신학교에 입학, 목회자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신학교시절 천성이 너그럽고 온순하여 접하는 동료들로부터 호감을 얻었으며 언제나 남에게 부드럽고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성격이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광주군 대왕면(당시)에 있는 세곡교회와 둔전교회에 전도사로서 봉사 하였다. 1948년 10월 28일 현석진은 한국신학대학을 7회롤 졸업하였다. 동년 12월 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28일 당시 전도사로 봉사하던 둔전교회에 목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40대의 현목사는 둔전교회 구역인 반경 20여리 마을 모랫말, 새술말, 외골, 저푸리, 청계산, 사송, 금토리, 너더리, 탄리, 야탑 분당에 이르기까지 전도에 힘쓴 결과 60여 평의 교회당에는 언제나 교인들이 가득 찼다.
1949년 동료목사의 소개로 여자신학교에 다니는 김양순을 맞아 결혼하였다. 많은 교인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복음전파에 힘쓰고 있던 중 1950년 6.25가 터졌다. 많은 교인들이 이북에서 월남하였고 요시찰 인물로 지명된 현목사에게 “어서 피신하시라.”고 간청하였지만 “내가 어떻게 교회와 교인들만 남겨두고 피난 갈 수 있느냐”고 거절하였고 동료목사들도 찾아와 피난할 것을 간청하지만 거절하였다.
피난길에 나선 친구들이 찾아와 밤이 맞도록 나라와 교회를 걱정하며 친구들은 혹시 누구 찾아오면 위험하니 숨어 있으라고 교회당지하실에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사택에 들어갔다. 1950년 7월 1일 새벽3시에 지역 공산당원 3명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월남자로 사상이 불순하고,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또 국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현석진은 나와라.” 그 소리를 들은 현석진목사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나가 같은 교회 김태수장로와 함께 검속되어 대왕지서에서 1주일 있다 광주결찰서와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간 후 44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