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음전파를 위해 꿈을 내려놓은 순교자” 생년월일 : 1910년 7월 18일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구 강서면 덕흥리 순교일 : 1950년 9월 22일 순교지 : 중화군 경찰소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
강광범은 충절의 고장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1910년 7월 18일 출생하였다. 신앙가정을 배경으로 착실히 배우고 보고들은 바를 열심히 몸으로 익히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상업계로 진출하여 이 나라 굴지의 대상인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쪽 방면으로 공부하려고 진남포로 나가서 진남포상공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상공업 분야에 대하여 공부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사업가가 되어 사업에 몰두하던 중 어ᄄᅠᆫ 여선생의 권면으로 부흥회에 참석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3년간 성경을 열심히 읽다가 차차 생각이 ‘세상적 물질로 축복을 받아 한국이 알아주는 세상인이 되는 것보다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민족의 스승, 복음의 대전조가 되어 민족의 가슴에도 신앙의 자유와 애국적 민족후진양육을 위해 헌신하리라.’는 생각으로 기울어져 1940년 30세에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35세의 나이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고 제41회로 졸업하였다.
1935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로 인해 신학교육이 위기에 직면해 있던 때 졸업한 강광범은 광복 이후 잔혹한 일제 뺨치는 갖가지의 핍박이 극심한 때에 평안 대동군 남곶면 군청 소재지가 있는 대동강 하류에 대이도리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공산당의 주일선거며, 기독교도 연맹의 사이비 어용단체의 속화만행을 보며 또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반동분자로 내몰리면서 지식인 숙청 등의 비행에 대하여 규탄하며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면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교육하여 나갔다.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강압에 못 이겨 공산당의 정치도구였던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을 때에 강목사는 계속되는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자 끝내 체포되어 내무서에 가두어졌다. 그러나 강목사가 김일성의 외족으로 착각한 공산당으로부터 풀려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강목사는 어느 것 하나 공산당에 협조하는 일이 없었다. 강목사교회의 시무장로가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자 "지금은 목회할 때가 아니다. 산에 들어가 기도할 때다."하고 강목사는 주저 없이 사표를 내었다. 대이도리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할 때 마침 예배에 중화군 중화면 성현리에 소재한 성현리교회 제직들이 참석해 설교를 듣고는 ‘아직도 살아있는 목사님이 있다.;고 하여 쫓기는 바람에 평남 중화군 중화면 성현리교회로 이직했다.
성형리교회에서 임직하며 감시대상자로 낙인 찍혀 알게 모르게 감시를 받으며 박해에 시달리던 중 6.25가 발발했다. 전시 하에 강목사는 납치당할 것을 예견하고도 교회에 나가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렇게 강광범목사는 교회를 돌보다가 그 해 1950년 9월 22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소위 반동분자 지식인 숙청작업 아래 체포되어 중화군 중화경찰서에서 모진 매와 갖은 고문을 당하다 경찰 유치장에서 40세에 순교하였다.
강광범은 충절의 고장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1910년 7월 18일 출생하였다. 신앙가정을 배경으로 착실히 배우고 보고들은 바를 열심히 몸으로 익히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상업계로 진출하여 이 나라 굴지의 대상인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쪽 방면으로 공부하려고 진남포로 나가서 진남포상공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상공업 분야에 대하여 공부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사업가가 되어 사업에 몰두하던 중 어ᄄᅠᆫ 여선생의 권면으로 부흥회에 참석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3년간 성경을 열심히 읽다가 차차 생각이 ‘세상적 물질로 축복을 받아 한국이 알아주는 세상인이 되는 것보다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민족의 스승, 복음의 대전조가 되어 민족의 가슴에도 신앙의 자유와 애국적 민족후진양육을 위해 헌신하리라.’는 생각으로 기울어져 1940년 30세에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35세의 나이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고 제41회로 졸업하였다.
1935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로 인해 신학교육이 위기에 직면해 있던 때 졸업한 강광범은 광복 이후 잔혹한 일제 뺨치는 갖가지의 핍박이 극심한 때에 평안 대동군 남곶면 군청 소재지가 있는 대동강 하류에 대이도리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공산당의 주일선거며, 기독교도 연맹의 사이비 어용단체의 속화만행을 보며 또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반동분자로 내몰리면서 지식인 숙청 등의 비행에 대하여 규탄하며 그들과 대항하여 싸우면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교육하여 나갔다.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강압에 못 이겨 공산당의 정치도구였던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을 때에 강목사는 계속되는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자 끝내 체포되어 내무서에 가두어졌다. 그러나 강목사가 김일성의 외족으로 착각한 공산당으로부터 풀려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강목사는 어느 것 하나 공산당에 협조하는 일이 없었다. 강목사교회의 시무장로가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자 "지금은 목회할 때가 아니다. 산에 들어가 기도할 때다."하고 강목사는 주저 없이 사표를 내었다. 대이도리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할 때 마침 예배에 중화군 중화면 성현리에 소재한 성현리교회 제직들이 참석해 설교를 듣고는 ‘아직도 살아있는 목사님이 있다.;고 하여 쫓기는 바람에 평남 중화군 중화면 성현리교회로 이직했다.
성형리교회에서 임직하며 감시대상자로 낙인 찍혀 알게 모르게 감시를 받으며 박해에 시달리던 중 6.25가 발발했다. 전시 하에 강목사는 납치당할 것을 예견하고도 교회에 나가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렇게 강광범목사는 교회를 돌보다가 그 해 1950년 9월 22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소위 반동분자 지식인 숙청작업 아래 체포되어 중화군 중화경찰서에서 모진 매와 갖은 고문을 당하다 경찰 유치장에서 40세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