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형규(裵 炯 奎, 1965-2007)

“여러분 언제까지 내 한 목숨을 위하여만 사시겠습니까?”
생년월일 : 1965년 7월 25일
출생지 : 제주도 제주시
순교일 : 2007년 7월 25일
순교지 :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주 카라바그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배형규 목사는 1965년 7월 25일 제주도 제주시 일도일동에서 아버지 배호중 장로와 어머니 이창숙 권사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웃 사랑과 정직을 강조했던 부모의 삶을 본받아 어려서부터 믿음 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학창시절 가난한 친구를 위해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들을 전도하고, 힘 약한 친구들이 괴로움을 당하면 그들을 돌보아주며 “나도 다윗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저들을 이길수 있어” 라고 믿음의 글을 적어 놓곤 했다. 대입을 앞두고 다른 친구들은 예배에도 나오지 않는데도 배형규 목사는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다른 예배에도 열심히 참석하였다. 결국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한 배형규 목사는 그때에도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었다.

대학에 다닐 때에는 대학생선교회(CCC)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전도와 봉사에 힘썼다. 당시 힘들고 어려운 교회를 찾아가 성가대 지휘자로, 중고등부 교사로 섬겼다. 특히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사랑방’ 이라는 신앙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어려운 친구들을 섬기고 신앙훈련을 생활화했다. 이 사랑방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누구든지 와서 먹고 잠자고 필요한 책도 마음대로 보십시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저희가 자동차로 손발이 되어드립니다."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한 후 그는 나무를 심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부르며 학교를 오고 갈 때마다 기도하곤 하였다. 그는 기숙사에 들어갈 때마다 항상 먼저 등록해서 가장 좋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군대에 있을 때에는 몇 달치 월급을 모아 입대한 후배에게 나누어주고, 한때는 커피를 끊고 돈이 없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자선하고, 실직한 교회 청년을 자신의 신혼집에서 2년 넘게 살게 하는 등 그의 삶은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일들로 가득하였다. 

배형규 목사는 서울영동교회 청년부를 다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역의 꿈을 키웠다. 대학생선교회 순장, 청년부 회장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부르심이 믿음의 청년들을 키우는 일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였다. 사명대로 살고자 청년을 양육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1998년 서울영동교회 박은조 담임목사가 분당에 샘물교회를 분립 개척할 때에는 청년부 전도사와 목사로 사역하면서 믿음의 청년들을 키워나가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는 항상 “청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데 인생을 걸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했으며, 그의 마지막 삶도 그러했다.  배형규 목사는 자신의 가야할 길을 예감이나 한 듯 아주 오래 전, 1994년 서울영동교회 청년회 시절 회보에 다음과 같은 묵상의 글을 남겼다. “우리 믿는 사람의 최고의 영광은 순교이다. 아프간 땅에 선교가 안 되는 이유는 그 땅에 피를 뿌린 순교자가 없기 때문이다”


2007년, 배형규목사는 자신이 양육한 청년이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가난과 절망의 땅, 아프가니스탄에 단기선교팀을 이끌고 갔다. 본래 샘물교회는 1999년부터 매해마다 단기선교팀을 해외로 파견해 왔는데, 2005년부터는 아프가니스탄에도 단기선교팀을 파견하였다. 그 당시 샘물교회는 아프가니스탄에 일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북부에 세 명, 남부에 네 명이었다. 북부에서는 여자 선교사 세 명이 교육을 못 받는 여성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였고, 남부에서는 부부 의사선교사가 무상으로 그들을 치료하거나 여성선교사들이 방황하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씻겨주고 교육시키는 사역을 감당했다. 2007년 배형규 목사가 선교팀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이유는 이들과 동역하며 그곳 주민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2007년 7월 13일 아프가니스탄으로 출국하여 수도 카불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열악한 버스로 해발 4000m 이상의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북부 마자리샤리프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북부에서 예정된 사역을 마치고 남부로 이동하고자 7월 19일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후 2시 30분경 카라바그를 지날 때, 갑자기 탈레반이 나타나서 선교팀이 타고 있는 버스를 멈추라며 손을 흔들었다. 버스 운전사가 그냥 지나치려 하자 탈레반은 버스를 향하여 총을 쐈다. 결국 버스는 멈추었고 일행들은 그들에게 납치되었다. 그 뒤로 무려 42일 동안 납치되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계속 끌려가게 되었고 배형규 목사는 이들 가운데서 순교하게 되었다. 

피납된 상황 속에서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껴 울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배형규 목사는 그들을 위로하며 담대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전 세계의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우리 중에 한두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제가 제일 먼저 앞장을 서겠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겠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중년의 유경식 전도사가 배형규 목사를 향해 "목사님, 순서를 좀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나이도 많고 살 만큼 살았습니다. 목사님은 나이도 젊으시고, 나가셔서 하실 일도 많으시고, 우리 팀원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셔야 하니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그랬더니 배형규 목사는 "아닙니다. 전부터 저는 나이가 들면 선교지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배형규 목사는 또 팀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저 사람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힘들게 하고, 심지어 우리를 고문하거나 죽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저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천군천사를 동원하실 힘이 있으셨지만 묵묵히 핍박과 조롱을 견디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배형규 목사가 순교한 7월 25일, 이날은 공교롭게도 배형규 목사의 생일이었다. 배목사는 이동 중에 자리가 불편한 자매들에게 담요를 받으라고 전해주었다. 사랑 많았던 배형규 목사의 마지막 배려였다. 차에서 내리자 탈레반은 배형규 목사를 끌고 갔다. 배목사는 팀원들에게 ‘믿음으로 승리하세요’라고 마지막 당부를 한 후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주 카라바그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만 42세,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온 날, 그는 다시 아름다운 순교자가 되어 하나님 품에 안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