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 선 ( 1895 ~ 1954 )

“ 보수정통신앙에 서리라 ”
생년월일 : 1895년 9월 20일
출생지 :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고보리 268번지
순교일 : 1954년 9월 2일(음)
순교지 : 강경읍장로교회
직분 : 집사
교단 : 장로교


1925년 9월 20일(음)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고동리에서 부친 이재원영수와 모친 황재화권사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태잠국민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삼등보통학교 6년을 졸업한 후 17세에 의학전문학교를 다니고 내과의원의 의조사로 근무하였다.

1944년 장순복과 결혼하여 장남을 낳았고 1948년에 공산당 박해에 못 이겨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

1951년 1.4후퇴 시 가족을 거제도로 피신시키고 해군에 입대 의무병으로 복무하였다. 휴전 후에는 제대하여 충남 강경읍장로교회를 다니며 중등부교사,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1945년 오병이어의 이적, 가나의 혼인잔치 이적 등을 부인하던 이단인 신신학파의 등장으로 진리가 왜곡되고 교회분열이 파급되었다. 그해 신신학의 무리들은 본 교회 당회장이던 이재화목사를 몰아내고 신신학파의 최대위목사를 강단에 세웠다.

이때 순수 정통보수신앙의 대표격이었던 이영선집사는 신신학파의 잘못된 성경해석과 폭력행위를 이단들의 폭거로 보고 대전노회 지도자들이었던 양화석목사, 김만제목사. 초오히총무, 아광국목사 등에게 보고하고 사태진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수세에 밀리던 이단들의 무리들은 교회의 대표적인 젊고 지혜롭고 영특한 이영선집사만 제거하면 다시 교회를 차지할 것이라는 착각에 이영선집사를 제거하는 작당을 하게 되었다.

이영선집사는 이단무리들로부터 악명 높은 상이군인들이 동원되어 강경읍사무소 2층으로 불려 무자비한 폭력을 당해 간과 쓸개가 혼합되고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실신하였고 42도의 고열에 시달리다 1954년 9월 2일(음) 만 29세에 순교하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이영선집사순교기념돌비